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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설교자의 땀과 피로 적셔져야 하며, 성령님의 감동을 담은 자기희생과 노력이 담긴 결실이어야 합니다. 본문과 씨름하며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자의 역할은 단순한 외침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심부름꾼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피와 땀으로 적셔야 합니다.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던 하늘의 만나가 매일 아침 내려주신 신선한 것만이 생명의 참 양식이었습니다. 어제의 것을 만져보았으나 그것은 이미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설교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각기 다른 목사님에게 똑같은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5회 이상이 50%, 3회 이상이 30%, 2회 이상이 80%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는 동일한 설교집을 본다는 결론과 더 나아가 '목회자들의 설교는 남의 설교집을 보고서 적당히 만든 것이다'라는 결론을 평신도들이 서슴없이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설교하는 모습 클립아트

우리나라를 기독교 한국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본 뿌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눈을 뜨나 감으나 설교만을 생각하면서, 신문을 보아도 한 마디 이야기를 들어도 설교와 연관시켜 가며 설교 준비에 땀을 흘리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여러 가지로 제한된 사연이 많아도 남의 설교를 멀리하고 스스로 그날의 본문과 씨름하며 말씀을 전하며 살아온 설교자들에게는 너무 억울한 통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방은 제 2의 창조라는 말처럼, 기본 틀과 방식, 스타일은 많은 설교집을 읽음으로써 나만의 특이성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마저 본을 따서 읽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바로 양심이 없는 설교자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현장에는 성령님이 동참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동참이 없는 설교는 공중을 향한 설교자의 외로운 함성일 뿐입니다.

 

삶의 고뇌와 뼈를 깎는 아픔을 느껴본 자만이 진정한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설교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맡겨진 양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의미에서 그 역할이 매우 큽니다. 교인들에게 맞는, 아니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설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 필요가 결여된 강단의 외침은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포사이드는 일찍이 "설교란 설교자의 땀과 피로 회중을 적시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설교란 성령님의 감동이 우러나도록 설교자의 땀과 피가 흐르는 자기희생과 노력이 담긴 결실이어야 합니다. 결코 대체할 수 있는 인스턴트 설교는 없습니다. 참된 설교자는 자신의 귀로 말씀을 먼저 경청하고, 현장의 자료를 다듬어 자신이 섬기는 양들에게 주어야 그 양들이 양육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설교자는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잘 터득하고, 섬기는 양들이 효과적으로 받아먹을 수 있도록 정직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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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는 주어가 있어야 하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 언어 관습을 분석하며, 설교에서 하나님을 주체로 삼는 바른 설교 방법을 제안합니다. 개인 자랑이나 비성경적인 언어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설교 문장은 주어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 설교자들은 설교 내용에 등장해야 할 주인 되시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지난주에 무엇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다는 등의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어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자신의 이야기와 섞어서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 뿌리 깊이 내려온 언어 관습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입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 주어진 메시지의 주인이 바뀌게 되는 큰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그 예를 든다면 설교 중에 "바울의 말이..." 또는 "베드로의 말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을 주어를 통해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와 같이 문장의 주어를 성삼위 하나님으로 고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하는 이미지

언어의 관습은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자의 모든 의식과 기능을 동원하여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설교는 참으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오랜 미국 생활을 통해 미국 설교가들의 언어와 한국 설교가들의 언어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설교자들은 오늘의 설교자들처럼 자신을 설교 가운데서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70년대 한창 번창했던 부흥집회에서 선별되지 않은 언어의 사용들이 설교 사역에 그대로 도입된 후부터 오늘의 문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시급히 시정되어, 진지하게 전하는 말씀의 사역으로 환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말로 가득 찬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제 생각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다." (요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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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찬과 성찬은 교회 공동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 목적과 역할이 다릅니다. 애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강조하며,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과 새 언약을 기념합니다. 두 의식의 차이점을 알아봅니다.

 

애찬이 성찬을 대신할 수 있나?

교회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주님의 부탁대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통하여 먼저 공동체 의식을 확인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식사를 아가페 식사라 이름하고 이 식사를 통하여 한 교회 식구로서 교제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애찬과 은사의 나눔 등이 예배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애찬에 대한 이미지

특별히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안수를 받지 않은 지도자들에 의해 애찬식이라는 것이 한때 크게 유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애찬의 향수를 느끼며 여름 수련회와 같은 곳에서는 그것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왜 지속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됩니다. 애찬의 현장을 살펴볼 때 그것은 성만찬 성례전과 비슷한 형태를 밟으면서 제정의 말씀도, 성령 임재 기도도 다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애찬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약식 성만찬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가 참여자들에게 결코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 형제자매 되는 그리스도의 식구로서 확인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습니다.

원래 초대교회는 애찬 또는 아가페 식사라고 하여 주일 저녁에 정규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식사는 단순한 식사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가운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데까지 연장된, 예배하는 공동체의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2세기 중반부터 교회는 이 애찬과 은사의 나눔 때문에 기독교 예배에서 많은 긍정적인 요소보다도 부정적인 요소를 더 많이 일으키게 됨으로써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은사의 나눔과 애찬을 교회에서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한국교회에서 청소년들의 지도를 위해 애찬이 필요하다는 전도사들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부작용은 적지 않습니다. 먼저는 거룩한 성만찬과의 혼돈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안수받은 목사가 집례하면 성만찬 성례전이고 안수받지 않은 지도자가 진행하면 애찬이 되는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는 성만찬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그 새 언약에 대한 확인의 장이지만, 애찬은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다짐하는 식사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제정의 말씀까지 봉독하면서 이어지는 그 현장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의식의 다짐은 단순한 감사의 기도와 우의를 다지는 찬송과 함께 이어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성찬에 대한 이미지

한국 장로교의 큰 줄기를 이어 온 통합측 교단은 애찬식의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부정적인 현상들을 보면서 연구 검토한 뒤, 애찬식이라는 이름으로 일체의 유사한 성만찬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예배에 관하여 가지고 있었던 지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엿보게 됩니다. 예배란 예배자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데 집중해야 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역시 예배란 인간의 교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교제를 위해 애찬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제는 교제 나름대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성찬과 비슷한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닌, 또한 예배와는 별개의 것으로 예배와 상관없이 애찬이 아닌 교제를 만듦으로써 논란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조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은 교제의 성격을 띤 애찬과는 엄연히 다른 신성시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배와 교제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은 예배 시에 행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애찬은 예배 이후의 시간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찬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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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성례전 후 남은 성물의 처리에 대한 논의는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신학적 고민입니다. 개혁교회는 화체설을 거부하며, 성찬 후 남은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음식으로 보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신중히 처리합니다.

 

성찬성례전 후 남은 성물의 처리는?

기독교가 초창기부터 안고 있던 심각한 사안으로서 초대교회 때부터 논란이 되어온 문제입니다.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는 지금까지 성찬 성례전에서 성물을 성찬상에 봉헌한 다음에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를 드리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성물이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채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된 이 성물을 나누어 준후 남은 성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는 일찍부터 논란을 거쳐왔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해결은 어떤 신학자의 해석보다는 역사적인 문헌을 통하여 그 대답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예로 기독교 예배의 초기에 속한 세기에 예배를 가장 잘 기록했던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보면 남은 성물에 대한 처리에 대하여 지침을 주고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조차 성찬 성물은 성스러운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만 할 뿐 남은 것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1525년 개혁 성향이 강했던 길버티 감독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안을 제시했고, 그것은 16세 트랜트 공의회에서 공인받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성당 제단 위쪽에 걸려 있는 감실의 설치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찬성례전의 떡과 포도주


그러나 문제는 우리 개혁교회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예배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먼저 우리의 성물에 대한 신학은 화체설이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신성시하여 모시고 그 앞에 절하는 행위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버리고 나누어 먹고 하는 것은 성례전의 신성함을 절하시키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수도원 같은 데서 만든 성찬 빵의 경우는 보관이 가능함으로 정중히 간수하였다가 필요한 대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일반 빵이나 떡의 경우는 남은 포도즙과 함께 안수받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예배 후에 목회자와 함께 앉아서 애찬을 갖는 심정으로 함께 성물을 처리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즉 성찬예식은 그 준비와 마무리를 목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존엄함이 결정되고 은혜의 척도가 달라질 수 있기에 성물의 처리도 달라질 수 있기에 성물의 처리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첨가해 두고 싶은 것은 성물로 사용된 떡은 그 양과 맛이 인간의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소량이어야 하고 맛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될 포도주 또는 포도즙은 알코올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희생을 재현하는 현장에서 인간의 식욕이 수반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신교에서 성찬에서의 중요한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는 교회당이라는 공간적인 제약과 안수받은 목사님께서 성찬식을 하는 그 시간 속에서만 그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일 수 있고 피 일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빵은 빵이며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의미부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것은 성물(화체설이 아님)이 될 수 있고 그냥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당이라고 하는 공간, 성찬식을 행하는 그 시간 속에서만 그 땅과 포도주는 성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찬식을 행하는 공간과 성찬식을 행하는 시간이 지났다면 그 남은 것들은 단순히 빵일 뿐이며 포도주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처럼 남은 음식조차도 신성시 여긴다면 그것은 화체설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분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찬식에 임하는 사람들의 개개인의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그 음식이 맛이 어떠하든, 알코올이 들어 있던지 없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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