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목사가 세례를 다시 받는 문제와 침례와 세례의 의미적 차이에 대해 성경적, 교리적 관점에서 논의합니다. 세례와 침례의 원어적 의미를 해석하며, 교회의 세례 관행과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침례 모습

 

목사가 세례를 다시 받은 사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교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들 교파마다의 주장하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본서의 문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본서에서 말하는 문제, 즉 장로교 목사가 침례교 목회를 위하여 침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 동시에 침례교 목사가 장로교 목회를 위하여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먼저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침례와 세례라고 부르고 있는 두 명칭의 차이일 것이다. 침례(浸禮)라고 번역하느냐, 세례(洗禮)라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사활을 결정하는 큰 문제가 아니다.

 

침례나 세례나 모두 동일 한 헬라어 (βαπτιζω)를 번역한 것으로 ‘잠그다'의 의미 외에도 '씻다', '정결케 하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에서 어떤 단어로 사용하는가 보다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줄 때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물을 약간 뿌리고 손바닥에 물을 묻혀 머리에 얹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선포한다. 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서 죽었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푼다.

 

침례의 의미도 동일하다. 베드로는 세례를 홍수에 비유한다. 곧 우리가 물을 통과하여 구원받았음을 말하면서 물의 위협적인 상징성을 생각나게 한다(베드로전서 3:21).

 

메러디스 클라인은 세례의 물을 씻음만이 아니라 심판의 물로도 볼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고전 10:2).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세례의 물을 죽음의 물의 위협에 비교한다. 홍수의 물, 애굽 사람들을 뒤덮은 그 바다의 물과 비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롬 6:3-5).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물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우리를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해변으로 데려다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벧전 3:18-21). 즉 세례(침례)의 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심판을 나타내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타낸다. 행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나타내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타낸다.

 

만약 형식에 대해서 반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과연 당신의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때에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려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단지 교단의 고집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례와 침례란 단지 번역과 형식의 차이이지, 의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번역과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의 교회도 그 세례(침례)의 형태가 어떠했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침례)를 서로가 인정하여야 하고, 그 신앙이 성장하도록 돕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세례는 흐르는 물에서 주시오. 그렇지 못하면 받아 놓은 물에서 주시오. 물이 차면 따뜻이 데워서 하시오. 아니면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 위에 물을 부으시오.” - 디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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