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성례전: 그 의미와 횟수에 대한 바른 이해
성찬 성례전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거행 횟수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관점을 이해하는 글입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을 상징하며, 신자의 신앙과 교회의 중요한 예식으로 자주 행해질 필요가 있지만, 그 횟수는 마음의 준비와 교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찬 성례전: 그 의미와 횟수에 대한 바른 이해
성찬 성례전을 좀 더 자주 거행할 수 없나요?
서론 : 성례전에 속한 성만찬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례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성례전의 용어 : SACRAMENT 성례전이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과 구원의 상징으로 맡긴 자들에게 베푸시는 거룩한 품속임이다.
- 성례전의 수효: 성례전의 수효 문제는 성례전의 본질 문제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에 의하면, 성례전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처음부터 나중까지 온갖 생명 속에 주입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하나님이 제정하신 선택원리와 성례전이 나타내는 조화와 미, 교회의 교리적 권위에 호소하여 성례전의 수효는 다음과 같이 7개로 고정되었었다. (1. 세례, 2. 견신례, 3. 성만찬, 4. 고해성사, 5. 종부성사, 6. 성직임명, 7. 결혼식)
그러나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 등 두 개의 성례전만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직임명, 결혼식, 종부성사와 같은 다양한 의식들은 그 방식에 있어서 성경적이기는 하지만 주님 자신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상징하는 것으로 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성례전의 효력: 성례전의 효력 문제는 상징주의(개신교) 대 실재론(로마가톨릭)의 논쟁으로 전개되어 왔다. 로마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성례전은 수혜자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적용한다고 한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도구이며 구속적 은혜의 원인이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로마가톨릭의 성례전은 마술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 속에는 인간의 주관적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장로교의 대표적 견해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의 선언에 잘 나와있다(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91문답). 이에 의하면, 성례전의 효과는 그 자체 속에 내재하거나 외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혜자의 신앙을 조건으로 한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에 있는 것이다. 즉 성례전은 한 개인이 중생하였다고 생각되는 때를 기준하여 그 이후에 실행되어야 한다.
본론 : 성만찬의 용어와 현 실태를 바로 앎으로 성찬 성례전 거행의 횟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 성만찬의 용어 : EUCHARIST. 헬라어로는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 "감사를 드린다"라는 뜻이다. 이 헬라어 동사와 그 관련어인 동족어들이 신약성겨에 자주 언급되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선하신 일을 통하여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유익한 도움에 대하여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의 사실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성만찬의 역사
예수님께로 돌려지고 있는 이 전례는 유대교의 유월절 식사였는데 예수님이 전통적 의식의 상징을 재해석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유월절은 애굽 노예상태로부터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기념한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첫 단계였다. 이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규정된 음식과 긴 예식 식사에 의하여 기념된다. 이 예식에는 해방의 이야기가 상징적으로 재연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자주 되풀이 하며 이로써 그의 죽음에로 들어감과 그 죽음으로부터 나옴을 경험할 것을 초대한다. 자신의 죽음을 유월절의 맥락에 위치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은 이 예식을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한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로 인도하는 해방으로 해석된다.
기독교 초기에는 성만찬이 일반 식사의 일부분으로도 자발적 분위기에서 기념되었다. 이를 위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이름으로 한 개인의 집에 모였다. 2세기 무렵에는 이 성만찬을 주교들로 알려진 지역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와 감독 아래 통제하려는 강력한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4세기 무렵에 성만찬은 공공건물에서 성대한 의식을 통하여 기념되었고 식사의 의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
보편적으로 화체설로 호칭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견해는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실제적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공재설로 호칭되고 있는 루터교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의 성분 가운데 참으로 현존하며 그러므로 참례자가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견해는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떡과 포도주의 요소 안에 다이내믹하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에 지금 우리가 따르는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는 츠빙글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떡과 포도주의 두 요소는 우리의 죄를 대신한 희생으로 제공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인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결론
이렇게 볼 때, 성찬 성례전의 횟수는 성만찬 자체의 행위가 아니라 본래 성서의 그 뜻과 의미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성서적인 것을 가장 이상으로 삼는 침례교의 신조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에 그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참례자의 소극적인 태도는 가톨릭의 미사와 같이 인간의 주관이 배제된 마술적 의미로 퇴색될 수 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인 예배를 받으신다.
성만찬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서 기쁜 예배로 축하되었고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과 구분되는 날이다. 이로 볼 때, 성만찬과 주일의 의미는 그 관계가 밀접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단연 주일뿐 아니라 매일 그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찬 성례전은 주일마다 이루어진다면 아니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안에 반드시 우리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마음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매일마다 주님과의 영적인 성만찬이 이루어진다면 성만찬의 횟수는 교회의 사정과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정해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주님의 성만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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