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매장을 고집하는 입장에 대한 반론

1) 성경은 어느 한 가지의 정묘 방식만 고집하지는 않았으며, 매장은 절대명령이 아닌 고대 근동의 장묘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매장이 화장과 비교해 훨씬 우세하게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신앙 행습에 의해 행해진 일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즉, 기독교 신앙은 매장만을 기독교의 유일한 장묘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모스 6:10에는 죽은 사람의 친척, 곧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으로 가져갈 것을 말함으로 화장의 경우 친척에 의하여 정중하게 집행된 것을 알 수 있고, 사울 왕과 그 아들들의 시신들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 중에 장사들에 의하여 화장되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그들을 칭찬하여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 (삼하 2:4-6) 다윗 왕의 칭찬은 물로 그들이 행한 장례방식 곧 화장 그 자체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비참하게 처리한 사울과 그 세 아들들의 시체를 위험을 무릅쓰고 못 박힌 성벽에서 끌어내어 정중하게 장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은 장사의 방법에 있어서 매장이냐, 화장이냐, 그 어느 쪽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형편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이 다 가능한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화장을 하나님의 심판의 한 예로 보는 견해는 화형과 화장을 구분하는 것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불의한 범죄자, 간음한 자, 원수 대적, 복수 등 대부분 좋지 않으면 “화형”을 처하였으나, 비록 전투에서 대패하긴 했어도 이스라엘의 처음 임금으로 명성을 날린 사울 왕의 경우에는 “화장”을 했던 것이다.

 

Sculpture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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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 윤리학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화장할 때, 과연 기독교 공동체나 기독교인 개인이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악영향을 얻게 된다면 화장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활 개혁실천 국민협의회가 지난해 장묘문화와 관련해서 전국에 거주하는 만 20세 이상 일반인 1,010명을 대상으로 벌인 국민 의식 조사에서 화장수용 여부를 묻는 질문에 찬성하는 사람이 65.2%, 반대에 21.7%가 응답했다 특히 응답자 중 기독교인 69.4%가 찬성한 반면, 2O. 5%가 반대했다. 화장이 미국의 거의 모든 기독교 교단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 점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통 유대주의를 제외한 보수적 유대주의조차 화장을 인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 중에 1978년에는 화장 비율이 8.49%였는데, 1988년에는 15.31%로 증가했고, 1993년에는 화장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약 20%에서 2010년에는 32.3%로, 미국인 3명 중의 1명이 화장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경우도 1991년 당시 60%의 화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사 내용으로 볼 때, 이미 국민과 기독교인의 정서는 화장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윤리학적인 측면에서도 화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3) 화장이 이교적 행습이라면 매장도 이교적 행습이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매장방식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 보면 유교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의 강세로 인하여 화장이 성행하다가 조선 시대에 오면서 중국으로부터 유교 사상이 유입되어 유교의 ‘인간론’이라고 할 수 있는 ‘혼, 백 사상’에 의해 장묘방식이 화장에서 매장으로 전환되었다. ‘혼백 사상’이란 “인간은 ‘혼’과 ‘백’으로 이루어졌는데 보이는 것은 ‘백’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혼’이다. 이 둘은 살아있을 때는 공존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혼’은 천상으로 ‘백’은 땅속으로 나누어진다."라고 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화장이 불교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기독교 신앙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거부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같은 이유로 매장도 거부 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의 죽음 처리에 대한 성서의 기록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곱과 요셉이 죽어 그

시신을 처리할 때 애굽의 장법인 미라 장법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히브리 장법과 이교도인 이집트의 장법이 접목된 예로서, 장묘문화의 토착화 작업과 화장을 기독교 의례로 수용할 수 있는 그 이론적 근거의 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매장이든 화장이든 부활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성경에 근거해 볼 때 어떤 형태로 죽든 - 가령 돌에 맞아 죽든 톱으로 켜서 죽든 칼에 맞아 죽든(히 11:37), 어떤 형태로 장례가 치러지든 부활체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따라서 부활체에 관한 한 매장이든 화장이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신자 중에는 화장이 비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데, 빌리 그래함은 화장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화장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화장하면 몸이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올바른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화장을 하든 묘지에 있든 몸은 똑같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우린 선조들의 묘지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묻혔던 묘지의 흙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에 관한 몸이나 묘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부활은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이 나사로의 부활과 전혀 달랐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사로는 묻혀졌던 무덤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는 그의 몸이 너무 변해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우리 몸의 매장된 상태에 관해서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로 된 것이 아니요”라고 했다(37절). 부활하는 몸은 매장된 몸과 같은 형체로 된 것이 아니라 멸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몸이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헐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집인 텐트에서 사는 것과 영원히 계속되는 영원한 집에서 사는 것을 대조했다. 우리의 몸은 일시적인 텐트이다. 우리의 부활된 몸은 영원한 집이다. 외양은 유사하지만, 실체는 다르다. 그러므로 화장은 부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지적한 대로 매장을 하든 화장을 하든 부활체에는 문제가 전혀 없기 때문에 장기 기증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신자들은 누구나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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