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장례문화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대안

 

서론 

 

모든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죽은 이에 대해 어떻게 이별을 고하는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특히 종교에 따라 현격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98년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묘문화를 둘러싼, 특히 장묘방식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논쟁이 화두에 오르게 된 것은 국토가 묘지로 뒤덮여간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모 재벌기업 총수가 스스로 화장을 선택한 사건 등이 화제가 되면서 기독교계 안에서 화장이 미래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장묘문화라는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비판 내지는 주의를 촉구하는 글들도 잇달아 발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장과 매장으로 집약되는 장묘방식에 대하 기독교 윤리학적 성찰을 시도해 보고, 미래 한국 사회의 장묘문화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논의의 발단

97년 연말 국내의 분묘 수는 1천 9백 98만기로 전국 학교 용지 (218㎢)의 4배, 공장용지 (412㎢)의 두 배가 넘는 규모이다. 거기다 매년 약 20여 만기(9㎢, 여의도 면적의 1.2배에 해당)의 새로운 묘지가 생겨나고 있다. 국민 1인당 주택면적이 6평에 못 미치는데도 분묘 1기의 평균면적은 15평이 넘는 상황이다.

그리고,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상가당 조의금 규모는 1천9백5만원이었으며, 한 해 평균 사망자 수인 25만 명으로 곱하면 2조7천3백75억 원이 우리나라 전체 한 해 평균 조의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다 문상객들의 날밤 새우기를 일당 개념으로 처리하면 ‘문상

경제학’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주먹구구식으로 한 상가당 평균 조문객 수를 최소 3백 명으로 잡고 교통비를 포함한 이들의 하루 일당을 3만 원으로 잡게 되면 대충 잡아 본 총 조문객 수(25만 명×3백 명)는 7천5백만 명이다. 여기다 하루 일당을 3만 원으로 쳐서 곱하면 2조2천5백억 원이나 된다. 이를 평균 조의금과 합치면 4조9천8백75억 원으로 우리나라 한 해 예산(70조 원)의 7%가 넘는 금액이다. 여기에다 장례비용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관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 밖에도 장묘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까지 심각해지고 있다. 묘지의 지속적 증가는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저해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전국적으로 10년 내외에 집단묘지 공급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보건복지부, 1997).

더구나 재원 부족으로 묘지 수급계획에 어려움이 많고 집단묘지를 위한 토지확보가 어려워 묘지공급이 매우 제한되고 있다. 이로 인해 묘지 사용료 및 부대시설 이용료는 지역별로 차이가 심하여 이용자의 불안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에다 호화분묘, 불법 및 무연고 묘지, 묘지 부족 난동 묘지 관행을 둘러싼 사회적 폐해가 끊임없다. 이러한 일들은 결과적으로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모 재벌기업의 회장 선친이 잠들어 있다는 묘를 파헤치는 유해인질 사건이 일어나 사회를 경악시켰으며 야당 총재의 조상 묘에는 길이 1m, 굵기 1㎝의 쇠막대가 박혀 있는 것이 드러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묘의 기운을 꺾어 후손에게 해를 끼치려는 주술적인 행동이 “유해 상해”라는 신종 범죄를 만들어 내는 등 무덤을 둘러싼 범죄가 끊임없이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매장을 고수해 오던 한국 사회는 매장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 폐해로부터의 대안으로 화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노력에 발맞추어 기독교계 내에서도 장묘문화개선 운동 내지는 화장장려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 화장만이 미래 장묘문화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한 입장은 회의적이다. 화장 또는 매장 가운데 어느 것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더 타당한 장묘방식이 될 수 있는가? 화장만이 매장으로 인한 폐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장묘방식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의식하면서 단순히 화장이냐? 매장이냐? 하는 선택의 차원을 넘어서 둘 다에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장묘방식인 매장만을 고집하는 의식에서 화장도 인정하는 의식으로 발상 전환을 시도하며, 또한 화장만을 미래 장례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매장의 폐해를 줄여 가는 개선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자는 것이다.

 

 

2. 매장과 화장의 용어 정의

가. 매장 :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땅속에 묻거나 돌 등으로 덮는 방법.

나. 화장 : 시신을 불로 태워서 강이나, 바다에 뿌리는 방법.

 

이처럼 시신 처리 방법의 하나인 매장과 화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화장은 시신에 두드러지게 인위적인 변화를 가함으로써 그것을 해체 시켜 버리는 시신 처리 방법인 반면, 매장은 시신이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시신 처리 방법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시신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 인위적인 변화를 가하느냐의 여부이다.

 

유대인 묘지
Pixabay로부터 입수된 ju-dit님의 이미지 입니다.

 

3. 매장을 고집하는 입장(화장을 거부하는 이유들)

1) 성경은 매장을 지지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래부터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성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장례를 중요시하여 매장을 원칙으로 하였다.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모두 사유 묘지에 정중하게 매장되었고(창 25:6, 35:29, 49:31, 50:13), 시온에는 다윗과 역대 왕이 매장된 묘지가 있다. 그리고, 신명기서는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신 28:26)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전도자는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전 6:3)라고 까지 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의 장례에서도 우리는 화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요바의 여제자가 운명한 후에도 주검을 씻겨 다락방에 두었고(행 9:37), 예수가 운명한 후에도 주검을 씻고 정한 세마포로 싸서(마 27:50, 요 19:40) 몰약과 향품으로 발랐다(요 19:40). 나사로의 주검은 수족을 천으로 묶었고, 얼굴을 수건으로 싸매었다(요 11:44). 그리고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고, 피리 부는 자와 떠드는 무리가 있었다(마 9:23-26).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기록을 보면(눅 7:11-17) 주검을 관에 넣어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묘지를 향해 가는데 그 어미는 울고 조상 객들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 안에는 곡하는 일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장을 한 사례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가 되어 입신을 했을 때 그녀를 화형에 처하도록 한 경우(창 38:24), 장모와 간통한 경우(레 20:14), 제사장의 딸이 간음했을 때(레 21:9), 아간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치고 시체를 불태운 경우(수 7:25) 에돔 왕의 뼈를 불 지른 경우(암 2:1) 등과 전사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주검을 불사르고 그 뼈를 장사하고 7일간 금식하였다(삼상 31:12, 13) 는 이야기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고 있다.

 

2)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도 매장을 지지하고 있다.

성경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막 12:27)을 계시하는 까닭에 죽은 자의 옴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있어, 신자들은 성경에 드러난 주검 처리 사례들, 그리고 그에 관계된 가르침을 따라 매장을 기독교의 장례문화로 삼아왔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화된 육체’로 부활하시어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에게 그 손의 옷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요 20:27)을 보고 믿게 하신 것, 모세의 시체를 놓고 천사장 미카엘과 마귀가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유 1:9), 구약시대의 성도들(에녹, 엘리야)이 산채로 승천한 것 등에서 육체는 물론 주검도 함부로 훼손하지 않음을 배울 수 있다.

한편, 초대 기독교인들은 화장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로마제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던 화장관습을 이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배격하고 유대인들의 매장관습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들은 죽은 자의 시신이나 유골에 대하여 많은 존경심을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이들의 몸은 성령의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고전 3:16, 6:19) 장차 부활하여 영화를 받을 몸이기 때문이었다(고전 15:42).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몇 가지 들어보자, 초대 기독교인들은 폴리캅이 순교 당하여 시신이 불태움을 당하고 남은 유골을 모아 매장의식을 치러 주면서 이 유골을 보석과 금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었다. 순교자의 유골을 이처럼 소중하게 다루는 예식을 통해서 이들은 앞선 신앙의 경주자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뒤에 오는 자들을 훈련하고 격려하는 기회로 삼았다. 한편 어거스틴은 시신 처리방식이 성도들의 운명에 하등의 영향으로 미치지 못함을 강조하면서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시신을 소중히 다루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중히 매장할 것도 아울러 강조했다. 주 후 100년경 기독교의 전파로 로마 전역에서 화장이 금지되었고 1000년경 아일랜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로 전염병 등으로 인하여 많은 시신이 단기간에 생겨난 것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장이 교회의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3) 화장에 얽힌 종교적 관념들은 기독교 신앙에 악영향을 미친다.

시신을 화장으로 처리한 이면에는 대체로 종교적인 이유가 뒷받침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다양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어떤 종교문화권에서는 시신을 그대로 두면 죽은 자의 혼형이 그의 시신으로 다시 찾아와서 살아있는 자들을 괴롭힌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을 불에 태워 없앤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서는 사람이 죽은 지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느키우아신의 힘으로 뼈에 생명이 돌아와 소생하여 가족에게 고문을 가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체를 태운 후 재로 만들었다. 특히 마술사나 범죄

자의 시신이 이렇게 처리되었다. 시암부족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천연두, 해산도중, 타살, 자살 등과 같은 악한 죽음을 죽은 자들의 시신을 태우지 않으면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와서 친구들을 괴롭힌다고 믿었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한 화장은 버마에서도 시행되었다. 또한

시신을 불태우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현세의 속박으로부터 철저하게 해방시켜서 내세에서 죽은 자들과 연합하게 하는 방편으로 해석되었다. 아프리카의 프랑스령의 귀아나의 와야나 부족은 영혼이 연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믿고 시신을 불태웠다. 인도 오지의 라오디아 부족은 하트사딜링(Hatsadiling)이라는 신비의 새의 모형을 만든 다음, 이 모형 안에 시신을 넣고 화살을 쏘아 이 새의 모형에 맞으면 불을 붙였다. 이 새가 화살을 맞고 죽어서 불에 타면 이 새 안에 화육되어 있었던 여신이 해방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열반의 세계로 호송해 간다고 한다. 한편, 로마인들은 죽은 자를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은 다음 화염이 장작더미의 끝에 이르면 가볍게 고정시켜 놓았던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이때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죽은 자의 영혼이 불멸자들이 있는 고향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상징했다.

힌두교도 불은 거룩한 헌물로서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어떤 계층에서는 죽은 자의 시신을 화장할 때 3~5개의 화염이 타오르도록 한 뒤 어느 불이 시신에 먼저 닿느냐에 따라서 죽은 자가 신들의 세계(젊고, 건강하고, 강한 자들이 속한 세계)로 인도되느냐, 아니면 마네스(manes)의 세계(늙고, 약하고, 기형적인 자들의 세계)로 인도되느냐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죽은 자의 영혼은 화염에서 나는 연기와 더불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화장은 불교의 교리, 즉 인과응보 사상에 근거하여 이생에서의 공적에 의해 윤회하기 때문에 무이고 공인 육체를 태워버림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처럼 시신을 불태우는 행위인 화장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수납하기 어려운 종교적 관념들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화장을 기독교의 장묘방식으로 채용할 경우 기독교 신앙에 악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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