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학 : 목회자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 들어가면서

목회는 죽는 날까지 평생 갈등의 산을 넘어가는 일이다.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으니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게 말라고 당부하였다(6:14). 이것은 바울 또한 그만큼 갈등 속에서 목회하였다는 고백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 관제가 성립되기 때문에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난관이라 생각된다. 파스칼은 인간은 갈등을 먹음으로 성장한다고 갈파(陽破)하였다.

 

따라서 현재 겪고 있는 다양한 류()의 갈등은 어떤 것이며, 이러한 갈등이 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다각적인 접근 방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의 갈등

 

몇 년 전, 영국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는 애석하게도 두 그룹 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인간의 본성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때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긴장감으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긴장감은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 사이의 관계를 상처 입힐 뿐만 아니라, 회중을 분열시키고 결국 커다란 상처를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문제들은 어떤 종류였을까? 담임목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대답하기를, 젊고 야망적인 부교역자들에게서 받았던 비난들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와는 반대로 젊은 목회자들은 담임목사에 의한 부당한 대우와 오해들로 인해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상호 보살핌과 배려가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분쟁이나 의심이 생겨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자. 성경은 이런 교역자들과의 관계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교회에 있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를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다. 목회자는 자신의 시간과 특권을 오직 복음의 증진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결코 기독교 봉사와 사역이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愈)을 채우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목회자에게 있어서 목회 사역을 빗나가도록 하는 유혹이 많은 것을 반중(反證)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베드로는 목회자는 그들에게 주어진 신뢰의 특권을 남용할 어떤 유혹도 피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목회자는 봉사하는 것이 자발적이어야 하지, 권력이나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라고 해서 부교역자들에게 권력을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오직 본이 되어야 한다. 사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 사이에서 오는 대부분의 갈등 요인은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자리 망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담임목사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적 사명임을 잊어버릴 때 돈과 권력에 약해지기 쉽고 따라서 권위 확보를 위해 부교역자들에게 설교나 리더십을 통해 권위가 생겨나면 가차(假借)없이 추방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부교역자들은 현재의 자기 위치가 목회자들을 도우러 왔고 담임목사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왔음을 잊어버린 채 담임목사의 자리를 넘보면서 교만한 행동을 하게 될 때 담임목사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부교역자가 설교를 잘할 경우 다시는 설교할 기회가 없거나 담임목사와의 마찰을 견디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톰 홀랜드는 이러한 관계에서 오는 갈등에 대해서 담임목사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에게는 담임목사의 가르침이 교인들의 신앙과 영성을 촉진시키지 못한다고 쉽게 결론짓는 행위는 교만한 감정이고 경험 부족에서 오는 열정일 수 있다고 말하고, 동시에 담임목사와의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손올 맞춰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고 말한다.

 

이유는 그것이 종의 모델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결론짓기 때문이다. 반대로 갈등이 빚어지면 그것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부교역자는 아직 성숙한 목회자가 아니다. 그들은 앞으로 한없이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담임목사의 뒤를 이어 언젠가는 한국교회를 어깨에 지고 갈 가능성이 많은 차세대 지도자들이다. 때문에 부교역자들을 억압과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바르게 훈련시키고 모범을 보여야 할 대상으로 여길 책임이 담임목사에게 있다. 부교역자는 담임목사의 밑에 있는 고용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담임목사와 동등하게 사역을 하는 동역자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부교역자는 필요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용병이 되어서도 안 되고 교회에 의해 내일의 일꾼으로 키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따른다. 부교역자에게 어떤 가능성이 보일 때이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는 사역자를 사역자로 존중하기도 어렵고 그렇게 대우해주는 것도 담임목사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이러므로 문제는 담임목사의 지나친 권위 문제와 부교역자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남을 우리는 다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준비된 만큼 쓰신다는 믿음의 논리를 신뢰한다면 부교역자들에게 아픔은 덜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양 무리를 맡아서 충실히 사역한다는 청지기 의식만 있다면 담임목사들에게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다.

 

절규하는 사람Pixabay로부터 입수된 Prawny님의 이미지 입니다.


. 부교역자 사이의 갈등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간의 갈등이 상하 계층 간의 갈등이라면, 부교역자간의 갈등은 같은 계층 간의 갈등이라 말할 수 있다. 같은 계층 간의 갈등은 성경 속에 많이 나와 있다. 가인과 아벨 형제간의 갈등 요셉과 그 형제간의 갈등 등이 그것이다.

 

부교역자들간의 갈등 요인 또한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문제가 생길 때 발생할 수 있다. 담임목사가 특정 부교역자에 대한 편애(偏愛)하고 있을 때 부교역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는 야곱이 요셉에게 가졌던 특별한 편애가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지독하게 미워하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던 것과 같다. 교회 내에 지연이나 학연, 친인척과 관계된 부교역자가 있을 때 담임목사가 공정성을 잃게 되면 부교역자간의 공동체는 갈등으로 쉽게 깨지게 된다. 또한, 부교역자들의 드러난 능력 차이에 대해서도 담임목사가 편견을 가지면 안된다. 왜냐하면, 착한 종이 있는 반면에 재능있는 종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착한 종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능력있게 일사천리(一爾千里)로 처리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을 수 있고, 재능있는 종은 하나님의 일을 수월하게 잘 해내지만, 사람의 마음을 평안케 하는 착함이 부족할 수 있다. 물론 착함과 재능을 골고루 겸비한 사역자가 우리가 추구하는 목회자 상이다. 그러나 목회는 팀 목회이므로, 부교역자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와 장점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담임목사는 부교역자의 장점과 달란트를 살려서 적재적소에 배치 해야 함이 옳다.

 

그런데 부교역자들끼리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서 일하기 때문에 지나친 라이벌 의식, 경쟁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쟁 관계에 있었을 때는 어느 사람이든지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결국 시기와 질투는 파괴적 관계로 발전되어 미움과 심한 갈등으로 남아 섬기는 교회를 사탄의 이용처로 전락시키고 만다. 같은 동역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교인들을 잘 돌볼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참으로 위선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가 요한을 걱정하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여기 머물게 할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편에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

 

이러므로 부교역자는 이 선하고 아름다운 형제 사랑과 영생의 못자리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프로들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프로, 연합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 결코, 경쟁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신약의 이상적 지도자 바울의 대인관계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와 너”, “우리속에서 생존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따라서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대인관계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가장 큰 재산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목회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에 필자는 이러한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이 시대(時代)에 사는 사람 중에 영적인 능력을 받았으나 대인관계의 실패로서 지적인 능력은 받았으나 신앙생활의 실패로서 결국 목회까지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너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대인관계(1-4계명), 대인관계(5-10계명)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인간관계 (Human Relationship)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필자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탁하는 말씀을 보면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대하는 인간관계에서 교훈을 찾고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1. 칭찬을 먼저 하는 습관을 길러라! (1:1-3, 고전 1:4-7)

바울은 권면할 때 항상 상대방의 마음 문을 열게 하는 준비작업을 만들고 나서 이후 대화가 매끄럽게 진행되고 그래서 분위기가 조성되게 하여 무슨 권면이든, 무슨 요청이든 뜻한 바가 성취됨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임이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음을 깊이 새겨야 한다.

 

2. 명령(命令)보다 부탁의 어조로서 말하는 자가 되어 보라! (1:2)

바울은 말을 명령식 어조로서 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빌레몬보다 훨씬 위의 사람이었음에도 명령하지 않았고 부탁의 어조로 접근하였을 알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1:8-9)라고 말씀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해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처럼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신사(gentleman)였다.

 

현대는 대화의 시대 화술의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령보다는 부탁의 어조로써 그리고 사랑의 어조로서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 귀중한 것이다.

 

3. 상대방에게 승낙(承諾)을 얻는 것을 무시하지 말라! (1:14)

빌레몬서 114절에 다만 네 승낙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바로 이 말씀은 바울이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아무 일도 시행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바울이 빌레몬의 승낙이 없으면 시행하지 않겠다고 했는가? 그것은 상대방 인격의 존중이요, 또한 상대방의 권한을 인정함이요, 상대방의 필요 존재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직분적으로 아랫사람이라도 승낙을 받으려 해야 하고 나이가 연소(年少)하여도 승낙을 받으려 해야 한다.

 

4. 겸손의 태도로서 상대방과 아무런 장벽을 두지 말라! (1:17)

빌레몬서 117절에 그러므로 네가(빌레몬) 나를(바울) 동무로 알진대 저를(오네시모) 영접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무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나이를 넘어서 빌레몬과 깊은 교분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왔으며 이제 그 관계를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빌레몬의 아량을 더욱 고무시키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자기의 강한 인정적 융통성을 표시한다. 그는 빌레몬이 자기의 후배요, 수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기의 동료로 추대한다. 사람의 심령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자는 자기와 남 사이에 아무런 장벽을 두지 않는 사이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같이 대인관계를 삶의 현장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도 실천하여 성공적이고 윤택한 인간관계가 정립되도록 힘써야겠다.

 

.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 지도력 갈등과 치유

 

앞에서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사도 바울의 대인관계 기술(技術)을 통해 무엇이 바람직한 언행심사(言行心思)인지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여기서 향후 21세기의 주역(主投)이 될 우리 부교역자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 지도력 갈등과 치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지도력 갈등과 교회의 정체

70년대와 80년대 급성장을 계속하던 우리 한국교회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정체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이러다가 교회가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란 우려가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심각한 리더십 갈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교회 어느 교단 할 것 없이 우리 한국교회는 몸살과 같이 지도력 갈등이라고 하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단언하건대 이 지도력 갈등의 치유 없이 한국교회는 정체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문제를 뒤로 미룰 수 없다. 21세기를 앞두고 우리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지도력 갈등의 문제다.

 

2. 지도력 갈등의 원인

지도력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 지도력 갈등의 문제가 일어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성장교회가 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한국교회는 전에 소유하지 못하였던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교회의 지도자가 원하는 것이 면류관을 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여 옛날에 십자가이었던 일들이 면류관으로 바뀌게 되자 자연스럽게 서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게 되고 서로 그 일이 자기 일이라고 주장하게 되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둘째, 역할과 지위의 혼돈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역할이 지위를 결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역할과 일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기 때문에 지위를 바꾸려면 역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할과 지위를 구별할 줄 모르는 의식과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셋째, 비민주적인 유교적 사고방식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대로 일을 맡게 하신다. 그러나 유교는 유사대로 일을 맡는 개념이 아니라 나이 순서대로 일을 맡는 개념이다. 우리 기독교의 정신은 민주적이고 전문적인 데 반하여 유교는 그렇지 못하다. 유교적인 전통과 문화 속에서는 민주성과 전문성을 살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안에는 유교 문화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자연 민주성과 전문성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영성과 부딪히게 되어 교회 안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3. 지도력 갈등의 치유를 위하여

우리 한국교회 안에 팽배한 지도력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 만인제사장설이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전서 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말씀이 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이 자녀들은 다 제사장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은 다 제사장이지만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장()이 서로 다르다. 목사가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곳은 교회요, 교인들이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곳은 세상과 직장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두 무대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는 무대와 세상이라고 하는 무대다. 교회라고 하는 무대의 주연은 목사이다. 조연은 교인이다. 세상이라고 하는 무대의 주연은 교인이다. 목사는 조연이다. 목사와 교인이 서로 주연과 조연을 다 맡아 감당할 때 교회도 건강해지고 선교도 활성화되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전도사를 비롯한 부교역자가 목회자도 아니고 교인도 아닌 불투명한 자리로 변질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력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마련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차세대의 주역인 부교역자들에게도 새로운 무대, 즉 향후 진로에 대해서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목사는 교회에서 주연을 맡고 교인들은 세상에서 주연을 맡아야 하듯이 담임목사가 주연을 맡고 부교역자가 맡은 담당 부서에서만큼은 주연을 맡아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 원칙은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다 장악하지 않고 권력을 분리하고 서로 협력하고 견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유교적인 전통이 강하여 목사든 장로든 어른이 모든 일을 다 장악하고 처리하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지도력의 누수(遍水)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지도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도 지도력 갈등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 한국교회의 당회는 삼권을 다 장악하고 있다. 정책과 예산을 세우고 그 정책과 예산에 의하여 집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집행한 사업과 예산을 직접 감사까지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목회도 담임목사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다 지는 목회를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교 회는 담임목사 한 사람이 다 감당할 수 있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면 목회는 민주정치를 따라야 하고 그 방식도 전문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은사대로 담임목사의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가지는 전문 목사들이 함께 협동하여 목회하는 이른바 팀목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목자 예수 이미지Pixabay로부터 입수된 Jo-B님의 이미지 입니다.


. 나오면서

 

앞에서 논한 것처럼 목회는 동등한 권한과 역할 분담이라고 하는 팀목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방안이다. 이것은 일인자 중심의 담임목사의 권한을 분리하고 이인자 할 수 있는 부교역자들에게도 동등한 목회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팀목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반영이다.

 

사실 팀목회는 신학적인 배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원리에 잘 나타나 있다. 삼위일체는 가장 많은 논란을 제기하는 주제인데, 특히 삼위 중 누가 가장 대표인가, 누가 가장 영원한가 등의 주제는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상호 순종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할 때 참된 공동체, 즉 팀목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서로를 섬기는 열망이다. 이것은 열린 마음과 겸손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이 담임목사 부교역자, 교인들도 하나이어야 한다. 그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목회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예외 없이 그것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갈등의 내용과 원인 그리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서 여러모로 살펴보았다. 만약 담임목사를 비롯한 부교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갈등을 직면했을 때 사심(私心)이 전혀 없이 정직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악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갈등은 사실 목회자의 영적 성숙을 위한 역동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갈등을 부정적으로 속단하고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한국 목회자들이 이러한 갈등의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는가? 갈등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고 본질을 쉽게 놓쳐 버리는 이유는 한국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문화 즉 사회적인 영향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불필요한 경쟁심 같은 것에 우리가 너무 매달리다 보니까 본질적인 문제들은 다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은 뒤집어서 표현하면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를 하면서 양심적인 갈등을 겪는 목회자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지금은 교회 성장의 시대는 아니다. 교회 건강의 시대다. 따라서 담임 목회자들은 부교역자들에게 지나친 양적 성장만을 강요하지 말고, 오히려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양적 성숙도 자동으로 발생한다.

 

과연 우리는 출세를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인지 저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받은 은사대로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갈등 해결 방안에 대해서 서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주님의 뜻이리라.


기독교윤리-목회자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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