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19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눅17:11-19
맹인 윤인수 목사님의 간증 : 중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그는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 닦기를 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기뻐하며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라고 말했다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수록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도움을 구하여 복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본문 말씀에 열 사람의 나환자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불치의 병을 고침 받고서도 그 병을 고쳐 주신분에 대하여 아무런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문둥이로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고생과 불행한 삶이었다고 불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괘씸한 일입니다.
1. 열 문둥이는 기도했습니다. (11-13절).
1) 멀리서서 기도했습니다.
➀ 문둥이는 부정한 병으로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문둥병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격리시키도록 했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건 사마리아 사람이건 상관없이 문둥병이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죄란 문둥병과 같습니다. 죄란 먼저는 마음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더욱 죄를 지을수록 양심이 화인을 받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죄의 결국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딤전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➁ 자신들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멀리서서 주님을 부릅니다. 우리도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눅18:10-13)에는 자신을 바로 안자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바로알지 못한 바리새인에게 대한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 따로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성경은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세리), 저보다(바리새인)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➂ 우리가 범죄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그곳 먼 곳에서라도 예수님을 부르고 찾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회개하고 주님을 찾으시면 주님의 손이 닫지 않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눅15:17-18)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2)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➀ 열 명의 문둥이는 예수님과 멀리 있기 때문에 "소리를 높여" 주님을 불러야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과 점점 멀어졌으면 묵상이나 속삭이는 기도로는 응답이 어림도 없습니다. 그때는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때는 금식도 해야 합니다.
(마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➁ 위급하고 어려울 때 부르짖는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점잔은 목소리로 “나는 지금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나를 건져 주었으면 합니다.” 라고 합니까? “사람 살려”하며 있는 힘 다해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길 가던 어떤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데 “사람 살려” 라고 외치던지 아니면 큰소리로 외쳐대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별 미친놈 다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시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➂ 이들이 부르짖음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간절한 부르짖음 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부르짖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려움을 당해도 주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3) 예수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➀ 예수선생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예수님이 자신을 선생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첫째는 가르치는 일, 둘째는 복음 전파, 셋째는 치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은 가르치는 일, 즉 선생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모두가 선생으로 부른 것으로 압니다. 병 고치는 것도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한 일부분입니다.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➁ 문둥병자들은 병 치료를 구하지 않고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천벌로 알았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은 무슨 공로 때문도 아니요, 또 내가 입술로 회개한다고 해서도 아니라 주님의 긍휼로 용서받습니다. 회개는 내가하되 용서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회개 하노라며 눈물 흘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9:5-6)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➂ 우리는 주님 앞에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간구해야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 없이 그 앞에 나가 도움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서민은 감히 왕 앞에 나갈 수 없고 왕이 불러주어야 나가고, 나가서도 얼굴을 들어 왕을 쳐다볼 수도 없고 다만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할 것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시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열 문둥이는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14-15절).
1) 그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문둥병이 나았다고 생각될 때 제사장으로부터 정하다는 판단과 나음으로 인하여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치료해 주시고 가라한 것이 아니요 그들은 여전히 문둥병자인데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을 그들이 행한 것은 말씀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기 쉽습니다. 예수님 먼저 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충성하겠습니다.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원리에 위배됩니다.
(눅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레14:3-21)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2)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신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표적을 보여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이 들어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자 엘리사는 나와서 맞이하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왕하5:10-11)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의 생각과 방법으로 치료를 받으려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대로 행하여야합니다.
3)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고 끝난 믿음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중에 모두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너무 좋았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홉 명은 자기 길로 가고 한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고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두배에 채우게 되었으나 (눅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보다 하늘에 것, 영적인 것, 신령한 것, 영생을 더 귀하게 여겨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떠나지 말시길 바랍니다.
(요6:66-68)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3. 하나만 감사했습니다. (16-19절).
1)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들
➀ 문둥병 때는 열 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행하고 비참한 자리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친구가 되어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눅17:17-1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이라는 아홉 문둥병자들은 병이 나으니까 문둥병자였던 사마리아 사람과는 멀리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형제들이었으나 혼혈족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이 나은 이제는 사마리아 사람과는 행동을 같이할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가는 곳과 반대로, 그래서 끼리끼리 갔습니다. 육신의 문둥병은 나았을 지라도 영은 여전히 문둥병자입니다. 병은 치료받았으나 영은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➁ 유대인들은 특권과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 고침을 받는 것도 은혜를 받는 것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더구나 개 같은 사마리아인도 병 고침 받았고, 나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은혜를 받아야만 감사할 이유가 되는데 문둥병자 열 사람이 다 나았으니 감사가 없습니다. 햇빛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기 주셔서 숨 쉬게 하심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에게 평범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탄광이 무너져 숨 쉬지 못하여 죽어 가다가 구조되면, 햇빛도 산소도 너무나 감사하겠지요!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➂ 자기를 모르는 문둥병자입니다. 아홉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감사로 보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내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주님이 은혜를 베풀었나를 알면 겸손한 마음이 되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모르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 됩니다. 배은망덕해서는 안 됩니다. 열 문둥병자가 무서운 불치병에서 고침 받았지만 아홉은 보답할 줄 몰랐습니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하시고
2) 사마리아 문둥병자 (눅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➀ 은혜를 깨닫는 자가 감사하게 됩니다. (눅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는 발견하다,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아무리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아도 깨닫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문둥병을 고침 받을 것은 기대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뜻밖에 기대 이상의 크고 귀한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고 깨닫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고, 축복을 축복으로 깨닫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으나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➁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홉 문둥이는 13절에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큰소리로 외치더니 나으니까 입이 닫쳐졌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같이 큰소리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고통 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더니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나으면 아홉 문둥이 같이 꿀 먹은 벙어리 됩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료함을 받고는 나아가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믿음은 진정한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마9: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➂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발아래 엎드리는 자세는 예수님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 받고 병 고침을 받고, 물질의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주님을 높이지 아니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을 높이면 주님이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가 주님을 낮추면 주님이 우리를 낮추실 것입니다.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➃ 감사는 더 큰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감사했던 사마리아인은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더하시나 감사가 없는 자에게는 그것으로 끝이 됩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구원 다시 말해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치료받는 체험을 했더라도 아홉의 문둥병자들은 병만 나았지 구원은 약속하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편 강도는 십자가에서 육은 죽었으나 주님의 나라를 허락하셨습니다. 기도해서 병 나았어도 교회 떠나고 예수님 떠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신유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신유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 구원받으라고 표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3) 감사는 받은 은혜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열 문둥병자가 똑같은 은혜를 받았으나 느끼는 것이 틀립니다. 감사는 받은 양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일에 대하여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과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감사하고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를 잊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사는 이유는 외적 환경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마음에 깨닫는 것과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세상 것보다 영적인 구원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만족하는 믿음입니다.
'설교의 단상 > 설교모음-5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19:65-72 고난의 유익 (0) | 2009.07.13 |
---|---|
시편 107:9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심 (0) | 2009.07.13 |
시편 4:4-8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0) | 2009.07.13 |
시편 50:23 감사로 드리는 제사 (예배) (0) | 2009.07.13 |
요한복음 2:7-10 잔치 집 (0) | 2009.07.13 |
누가복음 15:25-32 집에 있는 탕자 (0) | 2009.07.13 |
누가복음 15 : 17-24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0) | 2009.07.13 |
룻기 1:19-22 이가 나오미냐 (0) | 2009.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