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학사 - 삼위일체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사
저자의 생각
-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결정하였는가? 당신이 3세기나 4세기의 신학자라면 당신은 어떻게 논쟁에서 이겼을 것인가?
- 칼케돈은 잠시 멈추어 지나온 것을 개관해 볼 수 있는 좋은 지점을 제공하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칼케돈 정의의 복잡한 정밀함은 인상적인 성취를 알리는 것이지만, 그 정의 또는 그것 이전에 진행되었던 논쟁은 무엇이 중요한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정치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 두 가지 종류가 있다. cf) p.l12.
- 대체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구원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정의(正義)들을 회피하였다. 다른 논쟁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부 신학자들은 그들의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관념들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관념들을 발전시켰다.
“삼위일체설의 몇몇 측면들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성과 신성의 통일은 항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신앙에 도전들이 어려운 의문들을 제기하고 명료화를 요구할 때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기독론적 논의들은 커다란 성취를 나타낸다.”
내 생각
저자는 그 당시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항의가 왜 이렇게 결정되었는가에 대한 사상적인 배경을 설명해 주는 듯하다. 3세기 초 대부분 기독교인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단 하나의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항시 믿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신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에 소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처럼 보였다. 기독교가 동맹을 맺은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은 신은 변화하거나 고난을 당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시작되는 기독론과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들은 그들의 구원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현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들의 사상적인 영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일찍 도그마의 경직된 노예화의 근거를 제시해 준 것이 아닐까? 물론 그들로서는 자기 신앙에 위협을 느끼기에, 다른 관념들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자기들의 명료한 관념들을 만들어야 했고, 또 자기들의 사상적 배경과는 다른 관념들을 배척하고 정죄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3세기나 4세기 신학자들의 3가지 원칙을 보여준다. -성경과 모순되지 말라, 전례를 방해하지 말라, 구원의 수단을 위협하지 말라- 그러나 이것은 질문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질문에는 이미 그 당시 신학자들의 3가지 원칙에 대한 그들의 전제, 그들의 가치 판단의 기준, 그들의 생각의 근거 등에 관한 그들이 생각지 못한 그들의 사상 저 이변에 깔린 당연시 여겼던 부분에 대한 근거, 그것이 정직하고, 정당한가? 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이것이 해석학적 차원의 물음이라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또다시 해야만 할 것이다. ‘그들의 사상적 배경의 산물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자의 말에 의해서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는 결과도 있었고, 삼위일체에 관해서도 카파도키아의 세 신학자가, 보편적인 형상이 특수한 개인보다 더 실제적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 철학에 의해 그들이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교의적 결정들이 정치적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고 봤을 때 또 ‘그 당시 기독교가 신학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더라면 회교도의 팽창에 대해 보다 강력한 방어를 해내고, 나아가 중동 지방의 많은 기독교인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에 관해 사색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고, 4세기와 5세기의 신학적 논쟁의 결과들은 오늘날의 주요 뉴스에도 계속 오르는 충격을 지녔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당시 그 지역의 사상적,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이러한 것들의 산물이 절대적 기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듯하다. 이 말은 곧 사상적 서구화나 유대화가 기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각 나라의 언어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될 수 있고, 신학은 시대가 요청하는 모습으로 늘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순환론적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학 하는 사람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성찰적인 반복’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떠한 신학이 또는 어느 교회의 한 신조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서로의 상대성 속에서 자신들의 인식의 틀과 전제를 자기 성찰적 반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실천은 우리에게 ‘희망’일 것이다.
〈개요〉
3세기 초 무렵에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는 그들의 구원관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정확하게 규정짓는 관념들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둘 중의 하나가 무시되기도, 정죄 되기도, 또는 한 쪽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조화를 못 찾고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많은 공의회 들을 통해 정통의 틀을 많은 신학적, 정치적 과오를 범하면서까지 형성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도전들이 어려운 의문들을 제기하고 명료화를 요구할 때. 기독론적 논의들은 커다란 성취(?)를 나타낸다….
1. 구원의 수단
2세기 후반 남부 프랑스의 리용은 감독으로서 사도 계승론을 개진했던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보다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초를 바울이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으로 언급했던 것 속에서 찾고자 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재연 (recapitulation) 이론(그리스도는 아담을 오로지 거꾸로만 반복하였다)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그 이후 줄곧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을 뒷받침하였다.
1) 재연이론에 관한 해석 배경: 플라톤주의 철학 → “인류”의 통일성에 관한 가정, 재연이론의 여러 가지 해석에 하나의 공통된 가정-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아담의 범죄나 그리스도의 희생이 온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거였다.
2) 재연이론에 관한 해석들
I) 속임수: 어떤 설명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속임수를 패배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그리스도는 한낱 인간인 것처럼 보였으며, 사탄용 그것에 속아서 그리스도를 사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는 또한 신이었기 때문에 사탄은 그러한 노력을 함으로써 그의 권리들을 넘어섰던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하나님보다 사탄에게 복종하였으며, 그리하여 인류를 사탄의 지배 아래 넘긴 아담을 그리스도는 사탄을 패배시킴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였다.
(문제점: 사단은 진정 인류에 대한 정당한 권력, 사단이 그것을 넘어서는 잘못을 저지를 때까지는 하나님이 존중해 주어야 하는 권력을 지녔단 말인가? 그리스도는 속임수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수하였단 말인가?
ii) 회생과 법정의 언어를 사용 : 우리의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켰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에 입힌 피해에 대한 죗값을 하나님께 빚 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를 대신한 회생을 나타내며, 우리의 죗값에 대한 지불을 나타낸다.
(문제점: ➀ 하나님이 그러한 고난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도 우리를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➁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죗값을 지불한다는 관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두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식의 양자간의 분리를 의미할 위험)
3) 재연에 대한 상이한 설명들이 끼친 영향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상이한 이론들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성명들 모두는 반복적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를 인간이면서 신인 것으로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게끔 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Jeff Jacobs님의 이미지 입니다.
2. 닐케아로 가는길
전제: “기독론은 그들의 구원의 확신의 문제와 관련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기독론에 대한 정의와 명료화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내용: 200년경 로마의 세 신학자 ‘노예토수와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하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다음과 같은 난관에 부딪힌다. “신약은 반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구별’이란 말의 문제는 두 하나님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터툴리안과 오리겐은 ‘양태론’을 가지고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인데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아버지만 영원하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는 존재이고 어떤 시점에서 창조된 존재라고 말하였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인데 그는 아리우스의 ‘아들은 시작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는 주장을 비난하고 아들은 영원히 낳아졌다고 주장하므로써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 논쟁은 콘스탄디누스 황제의 관심을 끌어 그의 소집으로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정죄하였다.
3. 삼위일체
전제: 용어상의 구분에 있어서는 각 나라의 사상적 이해가 달랐다. 특히 삼위일체의 용어상의 구분을 지은 카파도키아안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용: ‘니케아 회의’는 ”동일한 본질“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타나시우스의 homoousios(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 동일한 본질) 개념은 ”유사한 본질“이라는 말, 즉 homoiousios로 바뀌었다. 그것은 유일신 주의에서 벗어난, 신적인 본질로 만들어진 두 개의 분리된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동일한 본질”로 되어 있으면서 동일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것은 “성령”에 관해서도 조화시켜야만 했다.
그 해결책을 발전시키는 과업을 지금의 터키인 카파도키아 출신의 세 신학자, 즉 바질(Basil)과 그의 형제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및 그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등이 했다. 이들은 용어상의 구분을 지음으로써 homoosios 신학을 구분하였다. 문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일한 본질”로 되어 있다면 그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리겐으로 돌아가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카파도키아인들은 ‘하나님은 하나의 ousia이지만 세 hypostaseis이다.’라고 말하였다. 예)피터, 메리, 존이 있다면 그들은 각각 특수한 개인(a hypostaseis)이지만, 인간성의 공통된 본질 또는 실체(ousia)를 공유하고 있다. 즉 피터는 한 개인으로서의 피터이고, 인간이다.
* 이 해석의 난점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신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 카파도키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특수한 경우인지를 설명하였지만, 보편적인 형상이 특수한 개인보다 더 실제적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의 철학에 의해 그들이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세 인간의 경우나 세 동전의 경우에서도-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하는 것 이상으로 저변에 놓여 있는 통일성을 보았을 것이다. 카파도키아인들의 삼위 일체론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 이 특수한 단어들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그리스어가 아닌 어떠한 언어로도 거의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터툴리안 시대 이래로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세 personae(성부, 성자, 성령)와 한 substantia에 대한 문자적인 라틴어 번역이며(두 단어는 모두 “밑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이없게도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세 hypostaseis" 라는 그리스어 표현이 ”세 substantia"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다. 결국, 기독교의 두 언어적 반쪽들은 그들이 동일한 것을 말하기 위해 상이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하여 언명될 수 없는 것들, 즉 우리가 결코 완전하게 언명할 수는 없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언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의 그리스 친구들은 하나의 본질과 세 실체들에 관해 이야기하였지만, 라틴인들은 하나의 본질 또는 실체와 세 위격(person)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4. 칼케돈으로 가는 길
1) 알렉산드리아: 로고스-육체 기독론과 아폴리나리우스주의
* 아폴리나리우스: 그리스도는 인간 육체를 가졌지만, 그의 속에서는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 정신을 대신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 부인, 플라톤의 인성 삼분법의 영향)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폴리나리우스를 비난, 그리스도의 정신에 적용되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그리고 “지혜가 자라는” 존재의 묘사 제시, 이에 아폴리우스는 인간 정신을 저급한 요소와 고급한 요소인 ‘이성’으로 나누어, 로고스는 단지 인간 ‘이성’만을 대체하였다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테오도르는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 이성을 결여하였다면 인간 이성은 신성과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구원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
2) 안디옥: 두 본성 기독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
테오도르는 그리스도 안의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카파도키아인들처럼 그는 용어상의 구분을 도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prosopon) 속에 두 본성(physeis)을 지녔다고 말하였다. 테오도르는 각 “본성”을 상이한 술어들을 부가할 수 있는 주어로 취급함으로써 이것을 설명하였다. (인간적 본성과 신적인 본성)
*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는 여러 문제들에 부딪혔다. 왜냐하면, 그는 이 두 본성 기독론이 갖는 함의들, 특히 하나님의 어머니 또는 추산자인 마리아에 관한 논쟁점에 대한 함의들을 끝까지 철저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모든 인류가 신성과 결합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신성과 결합되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이의 구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지적으로 서로 결합되는지를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네스토리우스의 엄격한 구분에 따르면 신성이 아니라 인성만이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431년에 에베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주교회의가 시릴의 주관하에 소집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정죄 되었다.
** 테오도르와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 지닌다고 가르쳤다.
5. 다시 알렉산드리아: 단성론
시릴에게 진정한 중요한 문제는 하나의 hypostasis 속에 두 본성이 통일된 것 때문에 한 본성에 속하는 속성들이 다른 본성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학술적인 라틴 용어는 communicatio idiomatun, 즉 속성의 교류이다.) cf) p.110.
속성의 교류에 대한 시릴의 주장은 여전히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정죄의 근거들을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태어난다”라는 인간적인 속성을 신적인 본성에 적용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릴이 한 본성에 관한 주장에서 두 본성에 관한 주장으로 전환함으로써 그의 지지자 중의 일부는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디오스쿠르스는 유티케스를 옹호하고 예수의 탄생 이후의 “두 본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정죄한 449년의 에베소 공의회를 주재하였으나, 이 “강도 공의회”에서의 처신들은 하나의 큰 스캔들을 낳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전통들과 시릴의 초기 견해에 충실했던 다수의 “단성론자” 기독교인들은 강도 공의회의 결론들을 수용하였지만, 다른 기독교인들은 두 본성에 대한 종죄와 소란을 일으키면서 그 공의회가 수행된 방식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사태를 바로잡기 위하여 451년에 칼케돈에서 또 다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칼케돈의 정의(the Definition of Calcedon)에서 주교들은 단성론을 기각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시릴의 후기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두 본성, 즉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하나의 인격 속에 공존하며, 인격의 단일성은 각 본성의 속성들을 다른 본성에 적용하는 것(속성의 교류)을 적적하게 만들어 준다.
정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안디옥 간의 모든 갈등들 속에서 로마는 항상 이기는 편에 섰으며, 칼케돈에서의 결정의 기초로 교황 레오의 편지가 사용됨으로써 정통의 조정자로서의 교황의 위신이 증대되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온 교황의 권위는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논쟁들로부터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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