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 - 존 비비어

2018. 1. 28. 20:00


존중 - 존 비비어


김훈 작가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을 <군사록>의 이야기로 풀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존비비어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글이 어렵거나, 난해하거나 형편없는 내용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의 글들을 접해 보았기에 제목을 보고도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그의 말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를 지탱해온 많은 뿌리를 단번에 정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썩은 뿌리 일지라도 나의 존재감을 상징하는 뿌리일 수 있으며,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일 수 있다. 다만 아직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까닭은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대한 미련일지도 모르겠다.

 

저자 존 비비어는 1990년에 ‘메신저 인터내셔널’이라는 전도기관을 설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저서들을 한국 교회에서 필독서로 선정될 만큼 많이 읽히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존중’은 그리스도인이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 ‘존중’의 무엇인지 그리고 ‘존중’의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해 성경적 원리로 접근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먼저 책의 첫 페이지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이 존중이다.’라는 화두를 던짐으로 시작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는 표현에서 한 획을 첨가하면 완전히 다른 표현이 된다.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긴다.’ 한 순간에 역전이 된다. ‘낫게’와 ‘낮게’의 차이는 한 끗 차이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대할 때 이 두 개 중에 하나를 사용하게 된다. 물론 남을 나와 같게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오늘의 문장에서는 남을 나보다 어떻게 보는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낫게’와 ‘낮게’를 선택해야 한다. 과연 누구를 나보다 ‘낫게’ 봐야 하는가? 누굴 나보다 ‘낮게’ 평가해야 하는가? 말이 복잡하지 전엽두에서 인지하기도 전에 결정하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튼 이 말은 빌립보서 2장 3절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새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빌 2:3-5)


저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존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의미는 첫 장에서 ‘존중’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로 풀이하는 과정에서도 엿 볼 수 있다. 그리스어로 ‘존중’은 티미(time)이며, 문자적 의미는 ‘중요시함’이다. 좀 더 단어의 이미지를 끌어 올리자면 이 단어를 사용하면 그리스인은 ‘금처럼 귀중하고 중요한 것’을 떠올린다. ‘존중’의 또 다른 정의로는 ‘진가를 인정함, 중시, 우호적 대우, 존경’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대로 ‘존중’의 반대어는 그리스어로 아티미아(atimia)이며, 그 뜻은 ‘존경하거나 중요하지 않다, 흔하거나 평범하거나 천하게 취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누군가를 ‘존중’ 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그 보다 뛰어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심정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할 때 형통함이 따라온다는 것을 첫 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 형통함의 모델은 진 에드워드의 책 ‘세 왕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우리에게 익숙한 ‘다윗 가(家)’의 이야기가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서 저자는 ‘존중’해야 할 범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정부 리더십, 그리고 사회, 가정, 교회 리더십을 왜 존중해야 하는지를 성경적 원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사실 원리는 간단하다. 모든 권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이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한 사람이건 실수하는 사람이건 상관이 없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누구든지 ‘존중’할 때 그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형통함을 약속하신다.


세 번째 장에서는 사역자, 동료, 맡겨진 사람, 자녀, 아내 존중하기이다. 좀 더 가깝고 실제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존중’임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존종함은 보상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존중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중의 보상은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 모든 참된 존중에는 보상이 따른다.” 즉 주위의 사람을 ‘존중’함으로 우리는 더 확실한 인생의 형통함을 경험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존중’의 결과는 그리스도인 종착점 예수님을 닮아 감을 이야기하며 마무리 한다.   


책을 덮으면서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만약 이 책이 인도 캘거타의 빈민가에 던져졌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무런 느낌도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낮은 사람이 ‘존중’ 해야 하는 원리 보다는 이미 ‘존중’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성경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섬기라고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빈약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섬김과 제자들을 향한 존중의 모습이 이 책 속에 포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도 있었다. 


첫째는 이전의 책 ‘순종’과 비슷한 내용처럼 느껴졌다. 물론 ‘순종’이라는 책을 읽은 시점이 오래 되었고, 비교 분석하면서 읽은 것은 아니니 느낌이라고만 하고 넘어가겠다. 


두 번째는 ‘기복 신앙’에 대한 저자의 초점이 너무 맞춰진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고민을 했다. 저자도 보상을 바라고 ‘존중’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적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존중’했더니 이렇게 복을 누렸다는 내용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라는 보상이 이미 지불했다. 그런데 자꾸 이 땅에서 뭔가 더 있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남긴다. 예수님은 생활비인 두 렙돈을 전부 바친 과부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을 보였으니 내일이면 좋은 직장이 생길 게다.”라든지 “당장 너의 집에 금, 보화가 끊이지 않을 게다.” 생활비 전부를 받친 것을 예수님은 아셨지만 거기에 어떤 물질적 약속의 말씀이 없으시다. 자신이 느낀 감사에 대해 표현으로 하나님은 드렸고, 하나님은 받으셨다. 그리고 끝이다. 거기에는 동화의 해피엔딩처럼 어떤 거래서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일종의 ‘존중’이라는 거래서에 싸인을 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쏟아 주실 것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 땅에서 주시는 선물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나 또한 누구보다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된 ‘기복 신앙’ 아니 ‘기복적 신념’은 마약 같은 것으로, 물질적 채움이 중단되는 순간 믿음이 흔들리며, 신앙의 의구심과 좌절감의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결국 작은 염증에서 시작하여 몸 전체를 잠식시켜 망친다. 이것에 대한 더 분명한 지적이 필요해 보이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성장운동이다. 이 책에서도 등장하는 모델이 있다. 순복음 교회와 조용기 목사이다. 성장주의를 말하면서 좋은 모델로 등장한다. 그 까닭은 성공한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성장 = 성공’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오므리 왕이 있다. 현대사에는 다윗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낸 왕조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참으로 인색하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왕상 16:25)


하나님은 과연 성장한 교회만 기뻐하고 인정하는 교회인가? 책에서 비판하는 가정교회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교회인가?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과연 ‘존중’하는 마음이 빠져있기 때문인가? 저자의 말처럼 사람의 동기는 하나님 말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열매를 보고 열매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성장한 교회의 열매들이 그리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존중’에 대해 많은 고민과 충격을 받았다. ‘존중’이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몸짓이며,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만물을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장 숭고한 고백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매일 삶 속에서 부디 이 고백이 이어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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