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기도를 평신도가 하게 된 까닭은?
한국교회에서 평신도가 목회기도를 맡게 된 배경을 살펴봅니다. 선교 초기의 상황, 예배 형식의 변화, 교회의 현실적 필요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목회기도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신학적으로 고찰합니다.
목회 기도를 평신도가 하게 된 까닭은…
서론
복음의 새로운 환경권에 실생활이 접착될 때 그 본질에는 어떠한 변화도 가속할 수 없지만 복음의 표현과 형태와 환경화되는 그 포괄적인 차원에서의 수용만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연구가 최근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많이 대두되며 지적되어져 가고 있다. 왜냐하면 토착화 없는 선교사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사실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일찍부터 이 문제에 대해 연구와 토론을 거듭하였다.)
선교사역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는 그 동안 서구 문화와 철저하게 결부된 기도와 교회를 접수한 선교자의 문화에 매여서 서구 다른 이웃을 우리 한국의 정서적 상황 속에 대입, 대치해야 할 것처럼 여겨 왔다. 하지만 실제의 삶의 차이로 인한 한국적 신앙표현에 비춰질 적합한 신앙표현에 대한 검토를 결여할 수가 없다.
본 글은 평신도와 목회 기도를 나누는 심각한 문제를 배제중에 놓지 않고, 여기에 있는 배경거리를 걸어가기도 등을 비춰보며 예배 도중 평신도가 성단에 올라가서 목회기도를 드리는 것을 검토하고자 드리는 것이다.

본론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평신도가 목회기도를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단순하다. 백낙준 교수의 학위 논문인 「한국교회 초기 역사」에서 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즉 설교와 더불어 평신도가 참여한 유일한 행사가 남아 있는 예배 중의 기도라는 것은 교회 형성화, 상황화, 토착화, 라고 요약되어 설명해져 있을 것이 아니리라. 그것은 단순한 선교사로의 기도보다는 한국교회의 교인 스스로 성경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가 필요하였기 시작하였으며, 왜냐하면 성교사가 한국말의 어휘 발음이 미숙하여 성도들이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할 언어들로 구사하면서 드렸던 기도가 설교자들에게는 전적인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도 선교사들은 성경낭독을 선포하고 기도토록 하여 성도 스스로의 영적 동참을 유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과의 일체는 자연스럽게 성도 자신이 직접 기도를 담당하도록 논리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두번째로는 또 다른 사실은 없을까 한다. 목회기도의 일원성에 행해지는 소리없는 잡음은 있었다. 그러나 학문자가 생각할 때 그것은 이러저러한 예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습성, 뒤틀려진 모습보다는 목회기도를 목회자들 스스로 갖기 위한 신학적 성격보다, 유동으로 나타난 당시의 예배형태 속에 있었다. 즉 설교 후 곧바로 찬송이 불려지면서 헌금의 순서가 있었다. 그런데 헌금기도는 목회자가 드리게 되었는데, 헌금은 신앙적 실천인 동시에 경제적 행위였다. 이 경제적 행위와 신앙의 관계성에서 헌금기도는 단순히 감사와 헌신만의 성격이 아니라, 목회자가 드리는 기도의 모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경제적 신앙적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금기도를 드리게 된 성도들은 목회기도에 대한 참여를 자연스럽게 이끌게 되었으며, 성도들의 기도는 단순히 경제적 성격의 기도에서 신앙적 성격으로 전환되어졌다.
세번째로는 단일교회 목회자 수가 적은 한국교회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목회자 수가 부족할 경우 당연히 목회기도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 부족을 메꾸는 것은 당연히 성도였다. 즉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경건의 삶이 드러난 장로, 권사, 집사들이 당연히 목회기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평신도 목회기도는 현실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현상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도는 예배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성도 스스로의 기도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예배의 전체와 성격을 인도하는 목회기도는 어디까지나 목회자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도 합당하다. 목회자의 설교와 목회자의 기도는 성례전과 더불어 예배 전체의 영적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기도를 드리게 한 것은 당시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실은 한국교회가 기도의 신학적 성격을 너무 강조한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예배 가운데 특별히 기도의 모임이 강조되며, 날마다의 기도회, 철야기도회, 부흥회 기도회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기도 자체가 성도의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아 성도 스스로가 기도의 담당자가 되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목회자도 예배에 참여하여 평신도로 하여금 목회기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중요한 사실은 기도의 신학적 성격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도 내용이 문제이지 기도하는 사람이 문제였다는 평신도는 중요하지 않은 현실이 됨으로써, 따라서 목회기도는 목회자에 의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합당한 기도로 평신도가 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목회자들이 도와주는 것같이 성격이 같다고 본다.
결론
평신도 훈련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 오늘날 평신도 사역에 대한 목회자의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담임목사 중심의 1인 체제는 전임되며 공동체요, 합력적, 전환적, 다양화의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과제라 생각된다. 그리고 초교파적이 이전의 사회특성과 같이 제사장 된 사명에게 실질적으로 평신도 훈련의 필요성과 더불어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목회기도도 역시 교회 목회자의 중요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자리임을 강조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목회기도의 본래 성격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평신도의 필요성에 의해 나타난 예배의 한 모양이 아니라 목회기도의 본래적 의미가 목회자에 의해서 드려져야 할 신학적 성격이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의 예배 속에서 기도의 성격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또한 성의 문화와 삶의 문화의 향유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예배모습과 시대에 따라 변화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피교회의 문제와 같은 것은 반드시 목회기도의 본래적 성격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반드시 기도의 책임자이다. 기도와 설교와 성례전이 예배모습의 중요한 중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배모습의 기도의 문제는 철저한 신학적 검토와 실제적 성격에서 검토할 수 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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