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멀린스의 예정교리 비교
서론
1, 연구 목적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정점은 구원이다. 구원의 과정 안에서 그 구원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엿보게 되는데 이때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결과냐 아니면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부여된 선물이냐가 문제가 된다.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일반적으로 예정론과 관계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을 개혁 신앙의 특별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신앙 안에서 일종의 에정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혁 그리스도인들은 예정론을 유별나게 강조하며 또 엄격하게 그것을 발전시켜 왔다.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의 행위를 수반한다. 이때 구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행위 중에서 어느 것이 논리적으로 앞서는가 하는 점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며 예정론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칼빈과 침례교 신학자 멀린스의 예정의 교리를 비교함으로서 침례교 신학의 예정의 교리에 관한 정서를 이해하고자 한다.
2. 연구 배경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작정을 미리 해놓으신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변명은 궁색해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물음에 대해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예정론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칼빈의 입장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강력함을 느끼게 하지만 왠지 구원을 받는 당사자들의 의사는 망각되어진 듯하여 허전하다. 이에 그럼 침례교 신학자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침례교 신학자 중 멀린스를 임의로 택하여 이들의 입장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본론
Ⅰ.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 고찰
이 장에서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것을 기본적으로 다룸으로써 멀린스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사가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이 꼭 단번에 구원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을 중생 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간을 두고 있다가 어느 기점에서 유효적인 은사가 임하여 인간을 중생 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바대로, “회심을 결정하는 불가항력적 은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이고 아무에게도 방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렇게 의지하고 전연 임의로 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인간의 의지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인간의 마음 밖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허락 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이 타락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이 주권적인 역사가 사람의 마음 밖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에 직접 역사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엣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요소에 부합되는 그러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은사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적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사의 역사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소생하게 되어, 결국 인간의 영혼이 소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하니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 인간의 자유의지의 허락이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타락적의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조화 문제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는 종교개혁의 초점이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는 문제 즉, 인간의 구주가 자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신가 하는 극히 신중한 문제이다.
2. 예정론의 근거
예정론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추상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하나님의 예정은 기독교적인 의미의 예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예정론의 근거와 출발점이다.
근본적으로 예정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감당하시고 인간을 구원과 생명으로 선택하고자 결정하신 사건, 곧 은혜의 선택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Ⅱ. 멀린스의 예정론
1.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려할 때 보통 예정(Predestination) 혹은 선택(election)이란 용어가 설명되고 있다. 선택 및 예정의 문제는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 in Salvation)을 누가 잡고 있느냐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이냐 인간이냐는 문제에 관련된다.
구원문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반드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과오들이 잇다. 이 과오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생각하는 방법상의 드러난 과오들이다. 이중에 대표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하나님의 “단순한 의지”(mere will)에 관련 시키려는 습관이다
1)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두 가지 오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내보이실 목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셨으며, 자기의 공의를 내보이실 목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을 받도록 예정하셨는 바, 결국 하나님은 이런 목적을 두고서 사람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온 세상을 위한 속죄가 아니라 단지 선택된 자를 위한 제한적 속죄란 결론이 나온다.
또 다른 내용은 이상의 견해를 약간 수정한 것인데 창조의 목적은 구원의 목적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도 역시 혹자는 영원한 구원을 위해 선택을 받았고, 혹자는 영원한 유기 또는 멸망을 위해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는 제한적 속죄가 기본 요소다.
우리는 전체로서 하나님의 성품 대신에 하나님의 성품 중의 단 하나의 국면이나 속성이나 특질을 고수하는 위험에 빠진다.
2) 멀린스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너무도 추상적인 방법으로 제시됨으로 인해서 흔히 딱딱한 교리로 되어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예정은 인간의 자유를 취소해서는 안되나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의 죄행위들에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것은 사람의 죄 행위들은 비록 유효하게는 아니지만 단지 허용적 의미에서 예정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지, 단지 독단적이며 전능적인 어떤 존재자의 관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반대하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 안에 통치권을 잡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은 자유적 인격성을 지닌다는 것으로 물리적 자연과 구별된다. 하나님은 자유적 존재자들에게는 그의 방법에 스스로 제한을 가하신다. 절대주권과 예정이 자유를 취소하지 않는다. 만약 절대주권과 예정이 자유를 취소한다면, 그땐 사람은 물리적 수준이나 적어도 짐승의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운명을 그의 자유적 피조물에 맡기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들의 자유를 존경하는 수단을 통한다.
4) 우주적 속죄
앞의 구원문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살펴 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오해를 가질 주장자들은 하나님의 인격에서 분리된 하나님의 “단순한 의지”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오해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릇된 전제로 인해서 딱딱한 논리를 가지고 그릇된 결론을 내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개개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얻을 때까지 첫 단계를 취하시사 그의 은혜로운 활동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멸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든 멸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살게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제한적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주적 속죄다. 또 하나님은 인간 독재자의 모습을 따라 독단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며 멸망시키는 활동을 하신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2.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하여 추상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에 따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즉각 판이한 분위기에 접하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은혜로운 목적은 인류적인 목적이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은 민족적이 아니라 온 인류적이었다. 택한 가정과 대한 민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그 자체 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보다 큰 목적을 향한 수단들이었다. 세계 역사상의 한 위기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선택을 받아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셨다.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국가가 되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전개이다.
2)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에 호의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의 시종일관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계에다가 하나님의 호의를 부여하는 것임을 구약역사의 전과정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세계적인 목적을 지닌 속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계적인 목적을 의미하며 내포한다. 그리스도는 “인자(Son of man)”이셨다. 그는 제 1세기의 단지 한 유대인만은 아니다. 그의 성육신으로 그는 인류와 유기적으로 연합하셨다. 그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대부분에서 복음이 해당되는 대상은 “모든 족속”과 “만민”이다.
4) 신약의 역사와 교훈은 은혜의 보편을 보여준다.
신약의 역사와 교훈은 성육신 및 속죄에 대한 이상과 같은 해석을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사도행전은 이방인 가운데서의 복음전파의 기록이다. 사도 바울의 선택과 그의 사명은 복음의 보편성을 특별히 말해주고 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복음의 보편성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진 지금 세대의 비밀이었다고 선언한다.
3. 개인의 구원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을 받도록 의도하시고 보존하시지만 그것은 사람의 행위여하에 불구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반응을 내포한 하나의 과정이다. 하편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능력을 무시하거나,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반응을 무시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며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무시하는 어떤 사물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불가항력적 은혜를 사용하시사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지원하는 통제적 은혜를 사용하시사 우리를 보존하신다. 즉, 하나님은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사 죄를 회개하고 타락에서 돌아오게 하심을 통해 보존하신다. 하나님이 방법은 하나님의 의지만이 모든 것이 되고 우리 인간의 의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범신적 견해에 속한 방법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의지는 높은 곳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의지는 작게 만들어 버리는 자연신교적 견해에 속한 방법도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적 하나님이시지만,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목표를 향하여 역사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인간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은 세계 속에 내주하시사 그의 자녀를 위해 거기서 섭리적으로 역사하신다.
구원은 단지 죄에서 구출만이 아니다. 칭의의 조건인 믿음은 또한 열매맺는 생활의 근원이기도 하다. 로마서 8장 29절부터 3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성도의 최후 영화를 모아 영적인 통일체의 결합 속에 연결시키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소급시키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유적 행동에 있어서 자기 결정적이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 처했었더라면 선택 행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할 때에는 그것은 자기자신의 자유적 행위다. 마치 물리적 세력이 불가항력적이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은혜는 물리적 세력처럼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영적 인격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4.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입장
1) 칼빈주의자들
하나님의 계획이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인간의 결정들과 행동들은 그 결과라고 믿는다. 구원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그 특별한 문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서 어떤 이들은 영생으로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믿게 될 것으로 미리 결정하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은 인간의 결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모든 개개인들이 어떤 특정의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2) 알미니안들
인간의 자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부여받은 의지를 활용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또 인간들이 그렇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알미니안들은 하나님의 결정들에 대하여 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계획을 형성하고 실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지하심(foreknowledge)의 역할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행하게 될 것들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발생하게 될 것으로 예지하신 것들을 의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의 견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들의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견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5. 온건한 칼빈주의의 형태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자유를 연관시키는 데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적 기초에서 하나님의 계획이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들이 자기들의 일들을 독립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선택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내용이 성경 안에는 없는 것이다. 알미니안이 말하는 선지(foreknowledge)의 개념은 매력적이기는 하나, 성경에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앞으로 발생할 일들을 알고 있는 지식으로서의 개념 이상의 것을 뜻한다. 그 단어의 개념에 대한 배경으로 우리는 단순한 인식 이상의 것을 뜻하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yada)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밀접한 지식이다-심지어 성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들을 만드셨는가에 대해서도 또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결정들과 행위들을 포함하여 앞으로 발생될 모든 일들을 확실하게 정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는 어떤 일을 확실하게 하셨다는 사실과 그것을 필연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 전자는 어떤 일들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의 문제이며, 후자는 그것이 반드시 발생되어야 한다는 그의 작정의 문제이다. 전자의 경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행동방식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은 그 어느 특별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확실히 정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러 가지의 선택들 중의 하나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내가 누구냐라는 사실에 의해 영향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란 나의 존재의 성격 안에서의 여러 선택 대상들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결정과 행동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애의 여러 상황들에 영향을 미치게 될 모든 환경들을 통제하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호소력 있게 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하게 매력적이게 될 어느 특별한 대상을 만들어 내시거나 혹은 그것이 만들어지도록 허용하실 수 있다. 과거의 나의 경험에서 지나갔던 모든 요소들에서 그는 지금의 나의 존재방식에 영향을 끼쳐 오셨다. 실로 그는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내시기로 의도하심으로써 지금까지 발생되었던 것들에 영향을 끼쳐왔던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행동들과 결정들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때, 완전하게 자발적이거나 임의적인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행동들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예견될 수 잇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개인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될수록, 우리는 그의 반응들에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가 임의의 선택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자유는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정들과 행위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하셨다는 사실과 조화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죄악된 행동을 취하게 허용하시면서, 사실상 “그렇게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부모들이 때때로 그 자녀들을 다루는 방식과 같다. 어머니는 그의 자녀가 어떤 특별한 방식의 행동은 하지 않기를 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의 자녀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금지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개입하여 그 행동을 막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의지란 죄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는 이 죄를 지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들을 허용하시고 또 죄짓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사실상 죄짓는 것을 뜻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확실하게 정하셨다 하더라도 그분도 계획은 또한 그 목적을 위한 수단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그 세부적인 부분들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시하신 내용에 기초하여 형성해나갈 뿐이다.
결론
멀린스와 칼빈은 서로 상이한 입장에서의 예정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그들의 신론과 구원론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성경을 통해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를 갖고 있이며 예정론의 부분에 있어서도 성경을 근거로 한 각자의 예정론을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는 일치하나 예정론의 세미한 부분에서는 현격한 드러내고 있다.
먼저 칼빈은 인간에 있어서 아담 이후 죄가 유전되어 죄의 본성이 부패되었다고 말하면서 구원에 관한 한 자유의지의 능력이 상실되었고, 그래서 선을 향한 자유가 없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멀린스는 하나님은 자유적 존재자들에게 그의 방법에 하나님 스스로 제한을 가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칼빈이 주장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에 반하는 내용으로 절대주권과 예정이 자유를 취소하면 그땐 사람이 물리적 수준이나 적어도 짐승의 수준이 되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자유를 존경하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멀린스는 말한다. 칼빈은 불가항력적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주장하나 멀린스는 자유를 존중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수단을 통해 구원을 이루게 한다면 서로의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침례교 신학자 멀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배제하지 않는 독특한 신학을 보여주고 있다. 멀린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 문제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고 예정의 교리를 이해하려 하고 있다는 데서 칼빈과 멀린스의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둘의 또 다른 차이는 속죄의 범위에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택자와 유기자를 정해 놓으셨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들 택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제한 속죄를 말하나, 멀린스는 하나님은 누구도 멸하시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기에 하나님께서 멸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속죄를 말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의 긍휼을 기초로 하여 택자들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멀린스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나 인간의 반응을 무시하는 것은 있다. 칼빈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고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에 믿게 되는 것이라고 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펼친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엄성을 갖고 있는 멀린스에게는 딱딱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멀린스는 내재적 성령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유적 행동에 있어서 자기 결정적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칼빈과 멀린스에게 있어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많이 보이나, 현격한 견해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다. 칼빈은 초월적 하나님을, 멀린스는 초월적 하나님과 동시에 내재적 성령을 부각시키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의지적 인간의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은총을 통해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강조하며, 침례교 신학자인 멀린스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자유를 거스르지 않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내보이신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의 입장은 쉽게 이것이 또는 저것이 옳다하는 결론이 날 것은 아닌 듯 하다.
신자들이 예정의 교리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이나 신학적 사색으로부터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침례교의 신학자 멀린스는 예정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빈과는 달리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인장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도 손상시키지 않는 신비적인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어떤 주의나 학파의 입장에서 출발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성경에 충실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의 예정의 교리에 있어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여 나머지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변증법적 종합과 균형을 이루려 하는 그의 신학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은근하게 숨어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맞먹는 부피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어쩌면 멀린스의 예정의 교리에 의한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 그 자유적 존재란 사실 때문에 인간을 향한 절대주권적 하나님의 행위에 제한을 가한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어 그 누구와 다른 독특한 신학을 갖고 있다.
인간이 자유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대등한 위치에 놓고 신학체계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 작성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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