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왜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그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 고통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군대가기 한 해전, 그러니까 1995년 봄 우리학교 내에서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이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 학교 신대원 학생 2명이 수요일 저녁 설교를 위해 자신의 사역지로 가던 중, 국도에서 커다란 트레일러와 충돌하여 그들이 탔던 봉고 차는 반으로 뜯기어 찢어지고 그들 중 1명은 죽고 1명은 병원에서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다는 것이다. 그 병원비 모금을 위한 캠페인이 있었고, 그를 위해 채플 시간에 기도도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와서 그의 정열을 불태우며 신학을 공부하던 청년, 작은 시골 교회 담임 사역자로 설교를 위해 차를 몰고 달리던 그 청년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란 바로 고통이었다.

그 이후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도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가 비록 소명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러므로 나의 최종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가?”

 

 

 

방법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면 고통을 지혜롭게 잘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극심한 슬픔 가운데서도 그 고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주제들과 달리 고통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취급할 수 없다. 고통의 위로가 목적이 아니다. 고통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모습과 의의를 일반사회적 의미로서 정의하고 성서적, 신학적 안목으로서 관찰, 반성해 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본론

 

 

Ⅰ.고통의 일반적 이해 및 정의

 

사람은 짐승들과 같이 단순히 아파(痛)할 뿐 아니라 짐승과 달리 괴로워(苦)하도록 결정 되어있다. 그러나 ‘괴로움’과 ‘아픔’이 모두 ‘고통’이란 이름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양자의 경험에 공통성이 있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역시 ‘괴로움’보다는 ‘아픔’으로 더 분명 하게 특징 지워진다. ‘상처의 괴로움’보다는 ‘양심의 아픔’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즉 ‘아픔’을 ‘괴로움’의 한 형태로 이해하기보다는 ‘괴로움’을 ‘아픔’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아픔’과 ‘괴로움’은 동의어가 아니지만 육체적인 아픔은 인간의 괴로움의 한 중요한 원인으로 남아 있고, 사람들이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상상하는 것이 아픔이다.

아픔은 괴로움의 형태를 치하는 것이다. 비슷하게 ‘괴로움’도 신체적 조직의 파괴란 표 현을 이용하여 서술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아픔의 경험에 서 괴로움을 이해하지만 괴로움의 경험에서 아픔을 이해하지 않는다. ‘아픔’이 더 구체적 이고 더 기본적이며, 따라서 아픔이 고통의 전형이다.

 

 

Ⅱ. 고통의 원인

 

1.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도 수반되어 있다. 따라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온 인류를 고통에 빠지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였다. (창 3:16-19)

병(病) 역시 아담의 죄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생긴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 으로써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 본성의 모든 부분에 영향 을 미침으로써 영구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 자신도, 환경도 모두 병들었다. (롬 8:19-23)

2. 하나님은 우리를 인조인간으로 만드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우리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마다 늘 개입하고 간섭한다면 우리는 화를 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가능하도록 우리를 자신의 형 상대로 만드셨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의인도 해를 당할 수 있고, 심지어는 불의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3. 개인적 책임

고통과 불행이 꼭 개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죄는 문제를 발생시킨 근원일 수 있으므로 그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삿 2:14,15)

명백한 죄뿐만 아니라 실수, 잘못된 판단, 그리고 어리석은 생각도 인간을 문제에 빠지 게 하고 불행한 결과를 낳게 한다.

 

4. 심리적 요인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 많은 경우 그 병의 초기 원인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병의 탓 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5. 하나님의 징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상, 인간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나님은 악으로 가득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벌하기 위해 불과 유황을 빗발치듯 내리 게 하셨다. (창 19:24,25) 그리고 하나님은 유다의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이 악 을 행하므로 그들을 죽이셨다. (창 38:7-10)

 

 

Ⅲ. 고통과 하나님 주권-성서에서 말하는 고난의 목적

 

역경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역사를 이루신 좋은 예는 요셉의 삶이다. 요셉이 애굽의 총 리가 되어 그의 가족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1, 고통중의 하나님의 목적

삶에서 의미를 찾는 순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요, 의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또 하나이다. 그런데 고통을 받 아도 어떤 의미가 있어 고통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수난은 의미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 를 의미 있게 하셨다.

 

 

2, 하나님께서 고통을 구원 계획에 사용하시는 목적

 

1).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해.......

C. S. 루이스는 교통을 일컬어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확성기라고 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 나니”(욥 36:15, 사 42:25, 렘 26:3-15, 호 5:15)

 

2), 하나님과 화해할 기회를 주기 위해......

하나님이 악한 세상을 즉각 심판하시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 해할 기회를 주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요 3:16)

 

3), 온전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 삶을 깨끗케 하려고 고통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 시기 위한 시련을 허락하실 수 있다. (시 66:10, 사 48:10,17, 슥 13:9, 말 3:2,3 벧전 1:7) 고통은 인내, 순종, 기대, 소망, 은혜, 그리고 믿음이 생겨나게 한다.

 

4),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돕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하나님은 또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게 하려고 우리 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 (고후 1:3-4)

 

5),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욥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조차도 하나님께 변함없이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욥 2-10)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과 거짓이 당신에게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문제 가 되기 전까지는 당신이 어떤 것을 정말로 절대적으로 믿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현실 적인 위험이 있어야 믿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11:4)

 

 

Ⅳ. 고난의 신학-신학의 고난 이해

 

1. 고난의 원인

성서신학에서는 고난의 “기원”(origin)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단 지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갖는다. 고난의 원인에 관한 고전적 구절인 창세기 3장 16-19절은 최초의 인간의 타락이 ‘해산의 고통’과 ‘육체의 고통’과 ‘육 체적 노동의 고통’을 가져온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가 곧 여인의 생산기능이거나 노동 그 자체이거나 또는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의 결과는 단지, 본래는 없었으나 범죄 후 있게 된 해산의 때에 오는 “고통”, 노동에 수반되는 고통, 그리고 사망의 독침이 주는 고 통만을 가리킨다는 것이며. 그것은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론적 해석이 말하듯이,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마침내는 정복될 잠정적인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보응으로서 온 것이다”라고 하는 인과응보의 교리는 구약신앙의 중심부에 들어올 수 없었고, 우리가 대표적 예로 욥기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대로, 의인의 고난까지 포함하여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보 는 세 친구-엘리밪, 빌닷, 그리고 소바르의 인과응보의 도그마조차도 사실은, 비판의 심 판대에 올려진 하나의 “추론적 교리”에 불과할 뿐, 고난을 인간의 죄의 한 산물로 보는 구약적 이해는 실재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이라는 맥락 안에 내재되 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안목에서 볼 때, 고난이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결코 페르시아 의 이원론적 신앙에 기초한, 이른바 악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조로아스터 종교적 신 념의 맥락에서 이해를 하거나 스토아 철학에서 믿고 있듯이 고난을 “인간 본성 속에 내 재하는 한 필연성”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구약 성서적 고난이해와는 전혀 다르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오히려, 구약성서는 고난을 신의 필연성으로서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의 한 도구로서, 이른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이해가 구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2, 고난의 의미

1), 고난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

하나님은 주권 신앙을 통하여 구약성서가 고난의 의미에 관하여 접근한 가장 원초적 인 모습은 역시 하나님이 설정한 도덕적 질서를 어긴 인간의 반역에 대한 신의 제동(制 動) 활동의 한 결과가 곧 고난이라고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를 제시함과 동시에 또한 범죄한 도성을 징벌하 려는 야훼를 향한 도전적 항변과 그리고 의롭게 살려는 자가 이 역사 안에서 겪는 그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오직 신을 향해서만 묻는 그 항변의 탄원도 함께 동시적으로 제 시해 왔던 것이다. 이 인식과 관철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하지 아니하고 이 고난을 그 고난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 가라고 하는 물음을 계속해서 제 기하였던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해석은 고난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 또는 훈련(Divine education/discipline)으로서 해석하는 점이다.

 

2). 고난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교육 또는 하나님의 훈련수단

고난을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신의 교육수단 또는 신의 훈련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예언자는 호세아와 이사야이다.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녀로 하여금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를 애써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하게 하리라. 그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고백하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대의 내 신세가 지금보다 나았지 하고 말할 것이다.(호세아 2,6-7[8-9])

 

가시, 담, 그리고 좌절의 허무를 ‘고난’을 표시하는 은유로 사용하고 있는 이 예언자 호 세아는 그 ‘고난’을 야훼 하나님이 주도한 이스라엘 구원사의 가장 적절한 도구라고 하는 것을 강력히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가시’와 ‘담’과 ‘좌절의 허무’라는 고난을 이스라 엘에게 부여한 그 원인자는 어디까지나 야훼라는 것이다.

또한 신명기 기자는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원전 587년의 심판사건과 같은 그런 고 난의 채찍이 있은 “후라야”비로소 야훼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줄 것이란 사실을 예언하다.

 

3). 동족이 받을 징벌을 대신 받는 지도자의 속량적 고난

지금까지 전래되어 온 전통적인 고난이해는 고난받을 만한 잘못이 있는 자에게만 임하 는 것이 고난이었다. 그러나 제2이사야를 통하여 전해진 바에 의하면, “고난을 통한 야 훼의 구원섭리”는 좀더 고차원적이고 좀더 현실적인 데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는 것 이다. 즉 야훼 하나님은 불의한 자에게 그 불의에 대한 그 불의에 대한 보상으로 고난 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불의한 자를 구원하는 수단으로서 오히려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부당한 심판의 희생물이 되는 것이 다름 아닌 인류공동체 구원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신앙의 출현 그것은 하나의 새 시대의 예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2이사야서의 고난의 종 메시지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의인의 대속적 고난 사상은 제2이사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계승되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매우 탁월한 성서적 정신세계를 형 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결론

 

구약성서의 ‘고난’이해는, 이상의 관찰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인류구원사의 섭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의미가 있다. 즉 “고난”은 인간을 그 죄 와 죄의 현실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사용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한 도구였다.

 

 

 

결론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 당해 본 사람들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통의 역설이다. 지나치게 무례하고 심지어 비도덕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할 것이고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살 것이다.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둔 채 고통만 제거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원하더라고 불가능 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금도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당할 것이다.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개발된 온갖 이기와 문화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고통만 줄어질 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오히려 늘어가고 그 상황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을 줄여주지는 못하지만 고통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나중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제공 할 수는 있다.

신학 역시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치료제를 제시할 수 없다. 확실한 치료제란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 인간이 거주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일 뿐이다.

다만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 의미와 목적은 본론에서 이미 다룬바와 같다.

인류의 죄의 원인으로 고통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에서 시작 된 고통은 다양한 의미와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고, 또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인간은 다만, 그 고통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양한 상황가운데서 이해하고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고난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에서 다루었던 말을 상기하면서 이 보고서를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면 고통을 지혜롭게 잘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극심한 슬픔 가운데서도 그 고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 작성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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