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청소부 밥
국내도서>경제경영
저자 : 토드 홉킨스(Todd Hopkins),레이 힐버트(Ray Hilbert) / 신윤경역
출판 : 위즈덤하우스 2006.11.15
상세보기

아직 신혼이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여러 핑계로 우리의 대화는 이미 짮다.

급기야 얼마전 아내와 말 다툼을 했다.

서로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함께 시간의 공유라고 한다면,

나는... 그래 나는 그냥 돈 벌어 오면 그만이지...

나머지는 나에게 피곤하고 짐일 뿐이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가 사뭇 미웠다.

뭘 해야 하긴 하는데 글쎄... 그게 뭐일까?

밥 아저씨는 나에게 나즈막히 조용히 속삭인다. 

재충전해라...

나에겐 지금 재충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다시 찾아 오는 것이다.

내가 꿈꾸던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 지금 이렇게 간다면 결국...

각자의 일에 바쁜 형편없는 가정이 되고 말겠지..

그래 밥의 말처럼 가정은 나에게 짐이 되고 발목 잡는 곳이 아니야.

무한한 가능성을 같이 열고, 축복을 나누는 공간이 분명해.. 

당장 아내와 두 손을 잡고 기도해야지...

지쳤을 때는 재충전하라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다.

투덜대지 말고 기도하라.

배운것을 전달하라.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

삶의 지혜를 후대에 물려줘라.

그래... 아직 나에겐 시간이 있어.....

거인들의 발자국 - 한홍

2009. 5. 10. 00:16


거인들의 발자국 (개정판)
국내도서>종교/역학
저자 : 한홍
출판 : 비전과리더십 2004.08.21
상세보기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니 그 이전에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그것 만큼이나 힘든 싸움과 끝없는 도전은 없을 것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교회에서 진정한 리더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다 예외가 될 수 없다.

 

혼자가 아닌 이상

내가 리더가 되어야 하기도 하고

리더를 따라 가는 입장에 서야 하기도 한다.

 

언제가 내가 리더로 서야 할 때...

그때의 나의 자세와 마음 가짐은 무엇이어야 하며,

리더를 따를 때 내가 해야 할 도움들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겨 놓아야 한다.

 

책 속에 많은 리더들의 성공과 실패담은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충고들이다. 

그 충고들을 가슴에 새겨 보고 있다.

 

.........................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책임자였던 브랜치 리키는 자신이 눈여겨본 탁월한 재능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게 거룩한 실험을 제안했다. 그것은 프로 야구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깨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성깔도 있고 힘도 센 사람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버스 뒷칸에 앉으라는 것을 거부하다가 영창에 간 일도 있었다. 그런 그를 앉혀 놓고 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란 책을 읽어 주며(로빈슨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이렇게 다짐시켰다. "이제 자네가 그라운드로 나가면 군중이 매 게임마다 갖은 욕설과 야유를 퍼부을 것이고, 물건들을 집어던질지도 모르며, 증오에 찬 고함과 눈길을 던질지도 모르네. 그러나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네는 절대 감정적인 보복적 반응을 해서는 안된네. 알겠나? 자네는 자네 자신을 위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라, 차별 받는 흑인들 전체의 명예를 걸고 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젊은 혈기의 로빈슨은 기도하면서 이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 약속을 지켰다.

 

운명의 날, 1947년 4월 15일부터 그는 부루클린 다저스의 1루수로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일은 쉽지 않았다. 로빈슨은 팬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욕설과 야유와 죽이겠다는 협박이 담긴 편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몇몇 동료들조차도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흘겨 보았다. 그가 실수라도 한 번 범하면 군중들은 당장 죽일 듯이 야유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후에 기록하기를 "로빈슨은 구장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모욕과 고통과 따돌림을 당하고도 저렇게 의연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로빈슨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모욕적인 편지를 보낸 팬에게 보낸 답장에서 로빈슨은 한 번은 이렇게 썼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나를 같은 인간으로 대해 줄 순 없습니까?"

 

그러나 로빈슨은 약속대로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며 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다른 선수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기까지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강타자인 미키 맨틀이 아직 신인이었을때, 로빈슨은 그를 직접 찾아가 악수를 청하며 "너는 정말 대단한 선수다.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훗날 미키 맨틀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토록 심한 모욕과 야유와 욕설과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 오클라호에서 올라온지 얼마 안 된 시골 풋내기 백인 선수에게 그런 따뜻한 격려를 해줄수 있단 말인가?"

 

로빈슨은 10년 동안 다저스 팀에서 뛰었는데, 그가 뛰는 10년 동안 다저스 팀은 6번이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47년에 그는 내셔널리그 최고 신인상을 받았고, 1949년도에는 MVP로 선정되었다. 생애 통산 타율은 0.311, 도루 197개, 6번의 월드 시리즈와 6번의 올스타 게임을 뛰는 찬란한 기록을 남겼던 그는, 1962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고, 1972년 5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거룩한 희생으로 인해 수백, 수천의 흑인 선수들이 미국 프로 스포츠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놓이게 되었다. 미국 프로 야국 최고의 홈런 왕이었던 행크 아론은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영웅으로 서슴지 않고 재키 로빈슨을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흑인 선수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을 넘겨 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야구나 다른 프로 스포츠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이 무너지는 데 몇 년이 더 걸렸을지 모른다. 내가 최고의 홈런 기록을 세우게 된 것도 바로 그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흑인의 긍지를 위한 어떤 사명감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던 것이다."

 

우린 다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5분을 더 참으면 그것이 바로 용기이다. 우리가 그렇게 용기를 잃지 않고 버텨낸 그 자리에,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찬란한 봄날의 푸른 새싹처럼 힘찬 꿈의 발자국을 찍을 것이다.

 

- [거인들의 발자국], 한 홍.  p.211~213.

한국 침례 교회사

2009. 4. 27. 21:21


 한국 침례 교회사


차 례

서 론

제 1 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

1. 펜윅 선교사의 내한

2. 엘라 씽기념선교회

3. 펜윅의 한국 순회전도단

4. 선교사업의 본격화

제 2 장 대한기독교회 (1906-1949)

1. 대한기독교회시대 (1906-1920)

2. 동아기독교회 시대 (1921-1932)

3. 동아기독대 시대 (1933-1940)

4. 동아기독교 시대 (1940-1949)

제 3 장 대한 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68)

1. 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51)

2.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1952-1959)

3. 총회 분열시대 (1959-1968)

결 론

논문참고도서

 

서 론

인간은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를 재 정리 함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우리 한국 침례교회는 지금까지 이러한 작업에 소홀히 해왔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침례교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 열정에 비해 역사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뒤늦게 나마 자료를 정리하고 줄기를 잡아서 한국침례교회사를 쓰게 된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여기에 한국 침례교회사는 1990년에 총회의 역사 편찬 위원회에서 집필한 [한국기독교회사]를 대부분 정리 요약 한 것이다.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말콤 C. 펜윅에 의하여 1889년 한국침례교회의 여명은 밝아 왔다.물론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셀러였는데 이들은 1885년 4월 5일에 인천항에 도착하여 장.감리교의 상주 선교활동은 시작되었다.당시 한국은 흥선의 쇄국정책으로 문명의 후진성은 모면치 못했고 민간의 신앙은 자연을 숭배하는 샤머니즘과 1500년간 내려온 불교와 이조의 건국이념인 유학 등이 삼교혼합이 되어 있었다.이런 가운데 개신교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고 그중 단독으로 입국한 말콤 C.펜윅(Malcolm C. Feniek,1863-1935)에 의해 1889년, 한국 침례교는 시작이 되었다.많은 시련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침례교회는 발전하였고 몇 차례의 시대적 변천을 겪은 후 오늘에 이르게 된다.

 

1> 한국침례교회의 시작시기 (1889-1905)

2> 대한 기독교회 시대 (1906-1949)

3> 대한 기독교침례회 시대 (1949-1968)

 

위 3시대를 거쳐온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를 본론에서는 요약하여 침례교회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서 침례교회의 역사와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자 한다.또한 선진들의 신앙여정을 따라 오늘의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제 1 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 (1889-1905)

 

1889년 말엽 캐나다의 일개 독립선교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도착한 말콤 C.펜윅(Malcolm C.Fenwick,1863-1935)기원한다.

 

1. 펜윅 선교사의 내한

그는 1863년 캐나다의 펜윅가의 11번째 아들로 때어나 성품은 강직하고 고집이 있는 의지형이고 모험적인데 다만 융화적인 성품이 결여된 약점이 있었다.그는 평신도 전도자로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과 사도행전 1장8절에 강한 도전을 받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26세 약관의 나이로 한국에 도착한다.1894년에 한국순회전도단을 조직하였는데 초교파적이고 복음전도적이며 진취적인 선교단체였다.

 

2. 엘라 씽기념선교회

보스톤의 클라렌돈교회 담임목사로 부터 3년간 펜윅은 신학공부를 하고 그 교회 집사의 외동딸 엘라양의 죽음을 기념하는 엘라 씽기념선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런다. 이 선교회는 우선 폴링선교사부부와 가들라인 여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다. 그때 전도를 받고 최초로 침례 받은 사람은 홍봉춘,장교환,김치화,고내수, 최춘명등이다.재정난과 타교단의 박해로 1900년 선교회는 철수한다.

 

3. 펜윅의 한국 순회전도단

1896년 한국 순회전도단의 책임자로 함경도 원산에 근거지를 두고 펜윅의 선교사역은 시작이 된다. 원산의 작은 초가집에서 예배했는데 이때 신명균을 만나 전도한다. 신명균은 외모단정하고 과묵하며 의지력이 있고 청렴결백한 선비였고 그는 서양사람의 오, 육인의 몫을 할 정도로 역량 있는 사람이 했다.펜윅은 한국인처럼 살려고 노력하여 '서양양반'이라고 까지 했다.1893년 펜윅은 요한복음을 번역 '요한의 기록한 복음'이란 표제로 간행했고 '만민에게 좋은 기별이라'는 전도용 소책자도 발행한다.


4. 선교사업의 본격화

1901년 엘라 씽 선교회를 인수하고, 한국 순회선도단과 병합하여 12월 강경에서 두 교회를 모아 대사경회(大査經會)를 인도한다. 신명균은 선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었고 공주,강경,칠산,한산, 온양, 옥천,영동,고산등로 확산되었다.1905년 공주교회내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신명균을 원장으로 장석천,황태봉,고문중, 이종덕등으로 후에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성경교육을 받게 되었다.신명균의 성공적인 결실은 펜윅으로 하여금 백인 우월주의적인 선교정책이 잘못됨을 인식하고 토착사역자들을 배출하는 중요성을 알게 하였다.

 

제 2 장 대한기독교회 (1906-1949)

 

대한기독교회는 한국 침례교회사에 최초의 총회조직이었다.1906년 10월6일 강경에서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46개의 교규를 만들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1. 대한기독교회시대 (1906-1920)

 

(1) 대화회 (大和會)

사도행전 2장의 신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고후5:19-21에 둔 '인류의 선결은 화목'이라 하여 대화회라고 했다.그리하여 회무도 화목의 잔치였고 교인의 친교에 역점을 두었다.첫 대화회는 1906년 10월에 강경교회에서 개최하여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회'로 칭하고 감목에 펜윅을,목사에 신명균을 세우고 46개조의 교규를 선포하고 만주시베리아,노영등으로 전도지를 확정하기로 결정했다. 대한기독교회의 행정구조는 권위주의적인 조직과 감독제도를 절충한 조직이었고 초교파적으로 신약 성서적인 특징은 있었지만 개교회의 독립성과 자치성,민주주의 적인 회중제도의 신약적인 사상은 전혀 없었다.구역도 설정하고 특히 신명균을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했고 한태영 외4인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하여 재만선교도 시작되었다.

 

(2) 구역설정과 전도확장

1907년 제2회 대화회가 공주에서 소집되었다. 원산에서는 성서학원을 개원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고 간도전도에 전념하였다.

제3회 대화회가 1908년 칠산에서 소집되었다.구역은 확장되었고 함경도,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제4회 대화회가 1909년 용안에서 소집되었다.경상도,전라,충청도에서도 전도활동이 활발하였다.

제5회 대화회가 1910년 강경에서 소집되었다.교세가 커져 4개월 사이에 35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이때 울릉도에도 전도되었다.

제6회 대회회는 공주에서 소집,복음찬미를 25장까지 번역하였고,

제7회 대화회는 산점에서 소집,각처에서 자력 전도자가 속출하였고

제8회 대화회는 신리교회에서 소집되었고 제9회는 원산에서 1914년 소집되었다.초기의 전도활동은 박해와 멸시,게다 재정적 곤란도 있었지만 자급개척,순회전도방식으로 전도했다.

 

(3) 재만선교와 간도선교

경제적,정치적인 이유로 만주와 간도에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기독교는 가장 유력한 종교가 되었다.초기의 선교의 동기는 정신적,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것이었고,일제탄압으로 인한 재만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한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한계를 재만한인들을 기반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한가지 추가할 것은 장로교.감리교 양교파의 예양협정으로 국내선교의 기득권을 잃었던 원인도 있다.

간도는 한태영외 4인이 제1회 대화회의 결의대로 파송을 받아 전도하여 얼마 되지 않아 30여개소의 예배소가 생기게 되었다.

 

(4) 지도권을 둘러싼 교회파동

제 2대 감목으로 이종덕목사가 임명된 것에 대한 신명균과 손필환과 펜윅의 갈등이었다. 1915년 펜윅은 단독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지만 출간되지는 못했다.

제11회 대화회가 1916년 새원에서 소집, 일본의 포교계 제출에 대한 거부를 결정함으로 박해와 구금과 집회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제12회 대화회는 1917년 간도 종성동에서 소집하였다.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활동은 큰 업적있고 특히 삼인전도기(신성균,박기양,노재천)는 순교자적인 감동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이었고 러시아선교에 나선 4인(박노기,박희서,전영태,최응선)은 대한기독교회 사상 최초의 순교자들이다.

 

(5) 신약성서의 출판(1919.10.18)

제14회 대화회가 1919년에 간도 종성에서 소집되었다. 1919년의 업적은 신약성서를 출판한 것이다. 1891년 요한복음전, 1893년에 약한의 기록한대로 복음이,1898년에는 요한복음.빌립보서합본이 원산역으로 나왔다.

제15회 대화회가 1920년에 영일 광천에서 소집되었다. '대한기독교회'란 이름으로 수난이 많으므로 교단명칭을 변경키로 가결하다.

 

2. 동아기독교회 시대 (1921-1932)

 

(1) 교단명칭 변경

제16회 대화회가 1921년 경북 광천에서 소집하여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유는 대한이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인상이 안 좋다고 트집을 잡아 변경을 강요당했다.

 

(2) 교회의 수난

만주와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교역자들은 공산당과 일제로부터 독립투사라고 오인되어 수난을 당하였다.손상렬목사는 한국독립단의 밀정으로 몰려서 순교 당하였다.이때는 한국이 개화운동과 문명퇴치운동이 활발할 때 펜윅은 3대 교의라 해서 1>성경을 많이 볼 것 2>성령께 순복할 것 3> 마귀를 대적할 것을 강조하여 대대적인 독경운동(讀經)이 일어났고 만주에는 성경학원이 설치되었다.

 

(3) 제3대 감목

제17회 대회회는 1922년 함북 증산에서 소집되었고 제18회 대화회는 1923년 강경에서 소집되었고, 8월30일부터 15일동안 원산에서 대안회(待安會)를 펜윅의 60주년 기념예배로 드렸다.

1924년 제3대 감목으로 전치규목사가 임명되었고,제19회 대화회가 행곡에서 소집되었고 교역자는 70명,전도는160명이나 되었다.

 

(4) 순교와 전도열

1925년 펜윅은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전도길에 오르고 제21회 대화회는 1926년 점촌에서 소집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6인 전도가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펜윅은 1926년 동아기독교회에 교단적인 학교교육폐지령을 내렸었다.

제23회 대화회가 1928년 원산에서 제24회 대화회가 1929년에 역시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이 해는 전국적인 구호운동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에서 쫓겨온 한인들을 구호).제25회와 26회 대화회도 원산에서 소집되었다.1928년 김영진목사.김영국감로가 순교를 당하였다.자료상으로 최초의 순교자는 1925년 길림성지역으로 파송된 윤학영, 김이주,박문기,이창희이다.

 

3. 동아기독대 시대 (1933-1940)

 

1930년대는 침례교회의 쇠퇴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을 황민화하기 위한 황궁요배,신사참배를 강요당하고 가중되는 식민정치, 펜윅의 소천으로 지도력의 약화로 교세는 약화되었다.

 

(1) 동아기독대

제28회 대화회가 1933년 원산에서 소집되어 교단명칭을 동아기독대로 변경했는데 이유는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라는 명칭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별된 양 무리를 뜻하는 '隊'로 하였다.1933년 1월 펜윅의 부인 하인즈가 소천하였다.

 

(2) 재한교회의 수난

1934년 전치규감목을 대신하여 제4대 감목으로 김영관감목이 취임하였다. 제29회 대화회가 1934년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성경출판을 위한 장기계획을 세우고, 경비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였다. 1935년 일제는 한국민족의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결국 장로교와 감리교는 굴복하였지만 동아기독대와 성결교는 불복하여 혹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3) 펜윅의 소천

1935년 12월 향년 72세의 일기로 46년간의 한국선교를 마감하였다.

펜윅은 사도 바울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노력하였고 , 그는 의지가 강하였고 강직하며 보수적인 성서관을 갖고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는 축호전도와 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또 제자훈련에 관심이 많았고 나라 사랑하는 옳바른 국가관을 강조하였다.

* 그의 공적 * 1> 대한기독교회의 조직 2> 동북아의 선교활동 3> 토착선교의 귀감

 

제34회 대화회가 원산에서 소집되었고 이종덕안사를 임시의장으로 회무를 진행하였고 1940년 제5대 감목에 이종근목사가 선정되었다. 그가 제5대 감목으로 피선된 때부터가 교단의 책임자로 대임을 받고 가장 많은 박해 속에 어려움을 당한 시기였다.

 

4. 동아기독교 시대 (1940-1949)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광분하여 내선일체정잭을 세우고 수탈과 한글사용금지, 창씨개명 등으로 일본과의 동화정책을 폈다.당시 한국전역에는 24개구역 100여 교회,만주에는 6개구역 100여 교회, 시베리아에는 2개구역 47개교회,몽고에 수개처의 개척교회가 있었다.이렇게 당시 한국 내에는 180교회가 기록상으로 있었는데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고,사경회나 원산 성경학원나 대화회를 통하였기에 신학적인 기초가 없다는 것이 동아기독교의 약점 중에 하나다.

 

(1) 교단명칭의 환원

제35회 대화회가 1940년 원산에서 개최되었고, 교단명칭을 '동아기독교' 로 환원하였다.

 

(2) 재만교회의 분립

일제는 만주에 있는 모든 기독교를 통합하는 합동정책을 써서 장로,감리,성결,안식,조선기독교,동아기독교등 6개교파가 만주국 조선기독교연맹이 되었다.그리하여 한국내 여러 교회와 분립케 된 것이다.

 

(3) 교회의 수난

1940년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의 치밀한 계획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말살정책이 강화되었다. 교단해체를 위한 작업으로 교단교규 제출령으로 탄압이 노골화되었고 집회의 자유를 박탈하고 1941년에 열려야 할 대화회도 열수가 없었다.또한 우태호 사건으로 인해 우리 교단이 불순단체로 오도되어서 신약성서,복음찬미,원산총부의 모든 문서,서류를 압수 소각 당하였다. 우태호사건으로 인해 원산 사건이 발생하는데 동아기독교와 성결교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도 원인이 되어 32명의 교단 지도자들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1944년 전치규목사(3대 감목)가 옥중순교를 당하였다. 1944년 5월 교단해체령으로 예배및 집회가 금지되고,교회가 폐쇄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는데 이때가 동아기독교 사상 최대의 시련기였다.이는 교단 반세기를 뿌리째 뽑는 대학살이었다.

 

(4) 8.15 해방과 교단재건

해방되기까지 15개월 동안 교회의 암흑기가 지났지만 해체령으로 인해 재건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그리고 북한의 교회는 공산주의의 도래로 더욱 큰 고난이 왔고 조국의 분단과 함께 남북의 교회도 단절되었다.1946년 9월 노재천감목의 소집으로 제36회 대화회가 강경에서 개최되었는데 42개 교회만이 참석할 정도였다. 특기할 것은 대화회가 총회제로,감목제가 회중체제로,임원도 새 체제에 적합한 명칭으로 바뀐다. 1947년 37회 총회 때에 옛날의 대화회제도를 존속하자고 하는 일부 교회가 총회로부터 분리되었다.해방후 북한의 교회는 제 1,2회 총회를 거치다가 6.25동란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남한의 교회는 49년 성경학원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제 3 장 대한 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68)

 

해방후 40여교회에 350명의 교인으로 교단 재건을 시작하였고 1949년 미국남침례교회와의 연결이 정식으로 출현한 것이 첫 출발이다.

 

1. 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1951)

 

(1) 교단명칭 변겅

1949년 제39회 총회가 강경에서 개최되어 '대한기독교 침례회'로 변경하였고, 미남침례회 고딘선교사와 일본에서 도조선교사가 한국교회의 파악을 위해 내한했고,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와 연결이 되었고 이해 교단의 두 지도자(장석천목사의 소천,전병무목사의 순교)를 잃었다. 1950년 미국의 존 애버내티 선교사 부처가 방한 제40회 총회에서 미국선교부와 정식 제휴하게 되었다.

 

(2) 6.25동란

미국 남침례교회는 동란 동안 영적 사역은 차선책으로 보일 정도로 난민구호에 많은 힘을 썼고 한국교회와 더욱 결속되었다. 3개월간채 안되어서 동란이 발생하고 1.4후퇴후 부터 9.28수복까지 당시 이종덕총회장을 비롯하여 침례교인 61명이 순교를 당하였다.

 

(3) 구호사업의 본격화

동란후 교세는 1946년보다 더욱 약화되었고, 제41회 총회가 원당에서 모여서 애버내티 선교사와 함께 미남침례교회의 구호사업이 시작되었다.이 총회에서는 이종덕목사와 61명의 순교당한 침례교인들을 위한 기념예배를 먼저 드렸고,미국교회와 제휴하기 위해 교회의 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또 한국침례교회도 세계침례교회에 가입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이사장 안대벽외 5인으로 문교부에 등록하여 합법적으로 승인 받았다.부산의 난민들을 대상으로 7인 구호위원회가 조직되어, 미남침례교회 원조금,의류,식량 등으로 활발히 전개되었고 레이선교사와 요큰의사,부라인의사가 방한하여 의료와 구호사업에 힘썼고 몇몇 미군목들도 큰 기여를 하였다.타교파의 교역자가(당시 침례교목사는 10인) 교단 내에 교역자의 부족과 선교비의 풍족함을 알고 교단 내에 영입되게 되는데 먼저는 교리적인 문제와 교권장악을 위한 파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침례교단은 혼합된 교리와 신조로 초교파한 집단으로 전락하는 위기감이 있었다.

 

2.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1952-1959)

 

제42회 총회가 칠산에서 노재천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어, 종래의 총회를'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로 하고 규약을 제정했다.미남침례회는 한국선교부를 조직하여 선교와 구제사업을 지속했다.

제43회 총회가 점촌에서 안대벽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었다.53년에 침례교단의 인재양성을 위해 대전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나요한원장이 취임하고,시은고등학교와 성애원을 인천에 세웠고 당시의 교세는 목사19명 전도사57명,침례인1356명,교회87개 였다.

제44회 총회가 대전에서 1954년에 신혁균목사의 사회로 회집되었고 대전 성경학원이 정식 문교부 인가 신학교로 승격하고, 부인전도회가 발족하고 침례출판사를 개설하였다.

제45회 총회가 1955년 충무로에서 신혁균목사의 사회로 회집되었고 제1회 교단지'침례회보'가 창간되고 영도에 왈레스침례기념침례병원을 크게 확장하고 세계침례회 총회에 한국대표를 파송하였다. 안대벽을 중심한 주류파와 조응철을 중심한 전입신진파의 갈등이 심화된다.

제46회 총회가 56년에 부산에서 장일수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다. 조응철목사를 퇴진시켰고 미선교부와 총화간의 사무절차가 수립되었다.그후 총회와 선교부와의 불화가 있어 한국식과 미국식의 정책적인 대립과 젊은 선교사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반발 등이다. 침례회신학교 특수과 졸업생 18명이 배출되다.

제47회 총회는 1957년 충무로 교회에서 회집되었다. 미남침례회선교부는 총회장 안대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 선교사월락스의 실언으로 더욱 갈등이 심화되었다.전국 교역자 강습회가 대전에서 열렸다. 침례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39명이 배출되다.

제48회 총회가 점촌에서 안대벽총회장의 사회로 회집되다.대전에서 173명이 모여 교역자부흥강습회를 실시하다.선교부 5개년 선교정책으로 '교인마다 십일조,교회마다 자립'라는 표어로 자립운동을 실시하였다.당시 교세는 전국 178개 교회 교역자 196명,16.000명 정도였다.

 

3. 총회 분열시대 (1959-1968)

 

한국 침례교 역사상 가장 불행스런 시기였다. 1959년 선교회측에서 안대벽총회장을 불신임한 것이 발단이 되어서 전통적인 주류세력과 선교회와 합세한 반대 세력란의 양대 진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국 대전총회가 대흥동교회에서, 포항총회가 포항교회에서 개최되었다.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신학교에서 교역자를 양성하고 진흥원을 설립하였고 다양한 선교를 실시했다. 반면 포항총회는 재정적인 난관으로 초교파선교단체로 선교하였지만 성애원도 폐쇄시킬 정도로 어려웠다. 교단의 분열의 원인은 이상적인 인물의 등장이요, 교단 중진들의 자숙의 부족으로 타교단 교역자들의 무분별한 전입이며 선교사들의 근시안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인한 것이었다.참으로 통탄한 일이다. 대전측은 '한국기독교침례회'포항측은'기독교한국침례회'로 확정지었다.(63년) 여기에서는 포항 측의 약사와 대전측 약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교단의 통합을 위한 합동운동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65년 침례회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이 전입파를 반대하고 선교부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주권을 회복 하여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선교부와 총회는 개교회 정책보다는 기관사업으로 전환되었다.이 때에는 특히 성령운동이 왕성히 시작되었다.결국 총회와 선교부에 의해 교단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은사와 기도원운동으로 회귀하면서 이 운동으로 인하여 교단의 통합을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결국 1968년 4월16일 한국침례교회사의 대교단을 통합되어 총회장 김용해목사가 선출되었다.

그후 침례회신학교는 한국침례교신학대학으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고(73년), 76년에는 교단의 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하고 77년에는 옥천수양관을 착공하고 신학대학 제 4대 학장으로 정진황학장이 취임하였다. 1979년에는 침례대학보가 창간되었고 1980년에는 1천교회 확장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결 론

먼저 침례교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갖게 된 솔직한 감정은 이제부터 또 다시 새로운 침례교회사를 창조해야겠다는 다짐과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 속에 한국 개신교회사의 전체접목을 가질 필요를 느끼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약소 민족으로서의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던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목회사역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논문참고도서


역사편찬위원회편저.『한국침례교회사』.이정수집필,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1990년초판.

김갑수목사 저. 『한국침례교인물사』. 시와 시론사,1981년.

 

작성자 모니카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있었다.


1.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

   에비온파와 알로기파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침례(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오셔서 그에게 메시아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룰성成 고기육肉 몸신身)하심(요 1:14)을 부정한 것이다.

 

2. 도케테파(Docetism)

   도케테파 혹은 가현설(거짓가假 나타날현現 말씀설說)은 게린더스(100년경), 그노시스주의자들(Gnostics),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앞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신신神 성품성性)의 입장에서 본다. 즉,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침례(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환영(변할환幻 그림자영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심(요 1:14)을 부정한 것이다.

 

3.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250-336년경)는 인성(사람인人 성품성性)과 연합한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최초의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반반半 신신神 반반半 사람인人)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초대 교부 오리겐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었다.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부정한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아다니시우스의 반박을 받았다. 아다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주장했다. 마침내, 초대 교회는 주후 321년 니케야에서 모인 세계 종교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과 본체시라(호모우시오스)는 사상을 바른 견해로 선언하였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것으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半)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비슷한 본질이심(호모이우시오스)을 주장했으나 호모우시오시와 '이'자 하나만 다른 호모이우시오스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할 수 없다. 반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4. 아폴리내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내리우스(310-390년경)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이 3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혼과 몸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5.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378-454년경)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된 제3의 성이 되었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전과 같지 않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6. 일의설(일의설, Monothelitism)

   일의설(一 뜻의意 說)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意 뜻지志)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경 제3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질(신성과 인성)과 두 의지를 고백한 것이었다.

 

8. 양자설(기를양養 아들자子 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주후2세기)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며 침례(세례) 받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818년 사망)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들입入 養)되셨다고 주장했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며,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9. 속성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675-745년경)이나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창문에 그려진 아름다운 성화Pixabay로부터 입수된 S. Hermann & F. Richter님의 이미지 입니다.


10. 인성 중심의 기독론

   칸트(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인 윤리적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휸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헤겔(1770-1831)는, 인류 역사가 절대자 혹은 하나님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과정의 절정이시요,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적 사상에 불과하다.

 

  슐라이엘마허(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 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릿츨(1822-18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셨고, 예수님의 선재(먼저先 있을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11.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루터파 가운데서의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에케노세)"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의 주창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토마시우스에 의하여, 전지, 전능, 편재의 속성들만) 혹은 전부(케스의 의하면)를 포기하셨으나, 부활, 승천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게노시스)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때에 그의 신성의 영광을 참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 마치 신성이 없는 분처럼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12. 점진적 성육신설

    I. A. 도르너(1885)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과 한 의지를 가지신 신인이 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주후 381년)

   "...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전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칼케돈 신조(주후 451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지신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이시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2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로스), 변화 없이(아크렙토스), 분할 없이(아다아이레토스),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성들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벼슬위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뉘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2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으신,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21문답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시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신조적 진술의 요지는

1. 그의 참된 신성

2. 그의 참된 인성

3. 그의 일인격성(一人 격식格 性)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