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니체, 소슈우르, 훗서얼에 대한 짧은 요약

 

마르크스 Marx, Karl Heinrich 1813~83


도이취 사회주의자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제창자. 사회주의  사상을 근대화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불린다. 유태인으로 태어난 본(Bonn), 베를린  양 대학에서 철학과 법률을 배우고 <<라인신문>>에 관계하였으나 정부의 비난을 받아  폐간당하였다. 파리로 망명하여 <<도이취, 프랑스 연보>> 등에 관계하였으며 쁘루운동(Proudhon)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45년
에 프랑스정부로부터 추방당하여  벨지움(Belgium)의 브류쎌(Brussels)로 망명하고,  엥겔스(Engels)와 함께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을 기초하였다. 
2년 후에 런던으로 건너가 연구와 집필생활을 계속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경제학비판; Zu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 1859>>의 간행,  제1인터내셔널의 소집(1864), 도이취 사회민주당의 조직(1869), <<자본론;Das Kapital, 2Bde>>의 집필 등을 하였다. 자본론은 제1권만 그의 생전에 간행되었고(1867), 나머지  2권은 그가 죽은 후 엥겔스에  의하여 간행되었으나(1885, 1894) 내용은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의 이론은 유물사관을 중심으로 한 집중의 이론, 축적의 이론, 빈곤의 이론, 공황의  이론 등의 경제적 여러 이론을 엿볼 수 있다. 

 

니체 Niet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


도이취 철학자, 시인. 자크센(Sachsen)의 뤼첸(Lutzen) 교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세 때 부친을 이별하여 모친, 여동생(Elizabeth)과 함께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하였다. 포르타김나지움 시대에는 음악과 휠더얼린(F. Holderlin)그리고 그리스, 로오마 문화를 즐겼고, 1864년 본(Bonn)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을  배웠으나 리츨(A.Ritschl)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Leibzig) 대학으로 옮겼다. 이 시절이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의 영향을  받고 바아그너(R. Wagner)와 음악을 통해 깊은 관계를 맺었다. 1869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승 리츨의 추천을 받고 스위스 바아젤(Basel)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또 정신적 도움을 입은 친구는 부르크하르트(J. Burchhardt)이다. 70년 보불전쟁이 터지자 위생병으로 지원하여 종군하였으나 적리와  티푸스(typhus)에 결려 의병제대한 후  평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젊은 니체의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로 알려졌던 바아그너의 음악에 대한 매력, 특히 비극 트리스탄(Tristan)과 이졸데(Isolde)를 듣고  매혹되어 그의 처녀작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극히 높은 음악평론지로서 그리스 비극의 성쇠 과정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었으며, 음악적, 디오니소스(Dionysos)적 정신이 일체 문화창조의 원동력임을 주장한 저서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적 기반을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에 두고 바아그너의 악극으로 새로운 도이취 문화의 창조를  외친 것이다. 그리하여 빙켈만(J.J.Winckelmann)과 괴테(J.W.Goethe)이래 아폴로(apollo)적으로만 해석된 그리스문화를  디오뉘소스적인 것으로 회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에 대한 비난이 많았다. <<반 시대적 고찰;Unzeitgemasse Betrachtungen, 1873~76>> 4편은 보불전쟁의 승리에 도취해 있는 도이취 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는 한편 바아그너의 사업을 원조하는  의도에서 쓴 저서이다. 1편에서는 헤에겔(Hegel) 학파의 신학자 슈트라우스(D.F.Strauss)의 <교양을 가진 속물>에 대한 공격으로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2편은 역사를 기념비적,  골동품적, 비판적인 세 종류로 구분한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이었다. 3편은 소펜하아우를 찬양하기  위한 것으로서 동시에 니체의 실존적 결의의 표명이기도 하다.  4편은 바아그너가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공연한 악극 <<니이벨룽겐(Nibelungen)의 반지>>에 관한  찬사이다. 그러나 그 열광적 찬사의 배후에는 이미 바아그너와 절교할 결심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천재적인 재질에 의하여 새로운  게르만(German)적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세우려고 한  로망적 이상(romantisches Ideal)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두통,  발작, 시력감퇴, 구토증 등에 시달려 1876년 대학에서 휴가를 얻어 이탈리아에서 정양생활을 하였다.  그 후 회복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1879년 대학에서 물러나 약간의 연금에 의지하여  알프스산과 이탈리아, 프랑스의 해변을  전전하는 표박생활을 하면서  병고와 싸우고  사색을 계속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Allzumenschliches,   1878~80>> <<서광;Morgenrothe, 1881>> <<즐거운 지혜; Die froliche  Wissenschaft, 1882>> 등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잠언과  사상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서  종래의 로망주의(romanticism)를 파괴하고 실증주의적 심리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1881년에는 로오마에
서 한 때 연애에 빠졌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말았다. 1883~1885년에 걸쳐서는 전에 알프스 산중에서 깨달은 <영원회귀> 사상을 기반으로 한 <초인;Ubermensch>의 이상을 그린 철학적 시사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91>>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 니체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모두  표현되고 있으나 이 추상성에 불만을 품고   구체적 논문식으로  해설한 <<선악의   피안;Jenseits von  Gut und   Bose, 1886>>을 저술하였다. 원숙한 문체로 함축 있게 표현된 그의  사상을 간단히 요약하기는 매우 어려우나 고귀한 정신적 귀족의 육성을 주장하고 장래의 위대한 입법자를 암시하는 한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단순히 객관에만 치우치고 있는  과학정신, 동정에 기반을 두었다는 기독교적 도덕, 역사의식의 과잉 등을 예리하고 독특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정치와 예술에 관한 언급은 없고 그 대신 고귀성을 가진 긍정적 인간의 전형이 시사되고 있다. 그 후 <<도덕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가  유럽 윤리사상의 비판서로서 출판되었으며 이때 이미 <<권력에의 의지; Wille zur Macht>>가 준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망 후에 유고만이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1888년에는 <바이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Gotzendammerung>>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저작을 남긴  그 해를 넘기자 1889년  1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정신착란에 빠졌다. 그 후 나움부르크(Naumburg)로 돌아가  모친의 간호를 받았으며 모친  사망 후에는 바이마르(Weimar)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동생의 간호  아래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사상은 <<자라투스트라>> 이후 절대부정의  절정에서 절대긍정 즉 <디오뉘소스적  긍적>의 입장에 도달하여 미래의 철학으로 돌진하려는 비상한 결의가 깃들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끔 법열적인 서정이 넘쳐흐르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의  심연은 사실 불가사의하나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기독교적 <신은 즉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여 여기에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서  전화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하려는 의도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명의 영혼  대신 영원회귀를, 선과 참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대치시켰다. 그의 저서는 생전에 많은 환영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사상은 원숙한 문장과 함께 주로 문학자들에 의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사상적 영향을  끼치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의 실존주의자들에 의해서는 그들의 선구자라고 불리게 되어 실존주의 사상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와 의의는 자못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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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els, Lenin, Marx @ Image by OpenClipart-Vectors from Pixabay

소슈우르 Saussure, Ferdinand de 1859~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 라이프치히(Leipzig)와 베를린(Berlin)에서 인도 유럽이 언어학을 배우고 1891년 제네바(Geneva) 대학 교수가 되었다. 업적 가운데 특기해야 할 것은 인도유럽어 원시모음론, 리투아니아어의 악센트 법칙의 발견, 일반 언어이론의  세 가지다. 일반 단언이론은 제네바대학에서 해마다 강의를 하였으나 저술의 형태로 남겨지지 않았던 까닭에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강의 노트, 선생의 수기 등을 기초로 편찬, 간행하였다. 이것이 <<언어학 원론(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1916, 3.ed., 1931)>>이며  언어학계에 새로운 풍조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논지의  중요한 것을 들면 1) 언어와 말(parole)을 확실히 구별한다. 언어는 언어습관의 체계이며, 일종의 사회제도이어서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말은 개인에 의한 언어의  사용이다. 언어활동(language)이라는 것은 이  이질적인 두 가지를 합치시킨 것에 대한 명칭이어서  그것 자체로서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언어와 말을 각각 별개로 고찰해야 하며,  이리하여 <<언어의 언어학>>과 <<말의 언어학>>이 성립한다. 그는 전자의 우위성을 인정한다. 2) 언어는 시간과 더불어 변천하는 것이나, 시간적  변천을   무시하고  요소의  상호   관계의  체계로서  고찰하는   연구를  공시론(synchronique), 시간의 축에 따라서 그  변천상을 보는 연구를 통시론(diachronique)이라고 하는데 후자의 이론을 고찰 연구하였다. 3) 언어학 전체를 통한 원리로써 자의성과 선조성의 두 개의 원리를 세웠다. 언어는  기호의 체계이나 기호의 성립인 소기(개념)와  능기(청각영상)의 관계는 필연성을 갖지 않는다.  또 능기는 선상을 이루고 계기한다.  언어현상은 모두 궁극에 있어서 이 두 개의 원리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훗서얼 Husserl Edmund 1859~1938


도이취 철학자. 1887년 할레(Halle) 대학 강사, 1901년 괴팅겐(Gottingen) 대학 대우교수, 1906년 정교수,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 교수. 1928년 교직을 그만두었으며 그 후도 연구를 계속하였고 소르본드(Sorbonne) 대학과 그 밖의 각지에서 강의와  강연을 하였다. 처음에는 수학을 배웠으나 브렌타아노(F. Brentano)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철학으로 전향하였다. 수학, 자연과학을 배운 그는 처음에 브렌타아노를 이어서 볼차노(B. Bolzano), 로체(K. H. Lotze), 데카르트(R. Descarte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영향을 받으면서 산술성립의 논리적, 심리학적 기초를 천착하고 이를 순수논리학이라 부르며 전개하였고, 동시에 상관적 문제인 의식의 체험을 다루어 의식의 본질을 지향적 작용으로 보고 그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해명하였다. 이 양자의 상관적인 관계에서 본질의 직각적 파악을 주장하고, 또  의식주관성의 내재적 영역의 근원으로 환원하는 태도가 후에 일층 철저하게 되고 정돈되어 소위 선험적 현상학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후설의 결정적인 입장이며 그는 이 학을 <엄밀한 학>, 모든 학의 기초가 되는 <제1철학>이 된다고 하였다. 현상학은 모든 <자연적 모습>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와 외계의 일체 대상을  <괄호 속에 넣어> 조정되어 있는 그  존재의미를 씻어내고(선험적 환원), 다음에 사실의 영역에서  본질의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형상적 환원). 이 두 현상학적 환원에 의하여, 근원적인  순수의식 또는 순수현상이 드러난다. 후설은 이러한 입장에서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의 상관관계에 있어서의 의식의 본질적인 구조를 분석, 기술하고 자연적인 사물, 유기체 더 나아가, 사회, 문화 등 일체의 대상의 규정을 논하고 다수의 주관의 상호적 또는 공동적인 문제에까지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현상학은 내용으로나 방법론적  면에서나 각 방면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학파는 괴팅겐(Gottingen) 학파, 현상학파 등으로 불리어졌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현대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도 이 학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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