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존재 증명 방법들
신 존재 증명
신 존재 증명은 유일자, 자존자, 창조주의 특성을 지닌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종교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된다. 이 신 존재 증명은 서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모두가 유일신을 믿고 같이 헬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에서는 신 존재 증명이 없다. 또한 동양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 등에서도 신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만이 논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구인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신 존재 증명은 종교철학의 중심 주제이나 결론이 나오기는 힘들다. 누구도 만족시킬 만한 for 나 against를 제시할 수 없다. 이것은 사변적인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1. 계시, 기적, 특별한 사건을 통한 증명 방법
종교나 신앙경험상 중요한 증명방법이다. 개인에게는 가장 강한 증명 방법일 수 있으나 그러나 객관적, 보편적 설득력이 가장 약한 방법이다.
2. 도덕론적 증명 방법
C. S. Lewis. Kent. Plato 등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세상에는 선이 있다. 이 선은 악과 대조되는 가치이다. 악 속에서 선은 희망의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선은 다른 source를 가지고 있음이 들림없다. 그러면 이러한 선의 source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인정하나 이것으로 절대 선을 증명할 수 는 없다.
칸트: 철학적 불가지론자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능한 방법이라 보았다. 순수이성의 한계라는 점에서 말하는 도덕론적 증명이 중요하다. 물 자체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현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신은 결코 증명(prove)될 수는 없지만 신은 우리들의 실천과 삶을 위해서 요청(postulate)된다. 윤리와 도덕이 실천이성이 있어야 될 이유가 된다. 실천이성적 도약은 근대철학에 있어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쉐퍼는 이것이 근대철학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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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존재론적 증명(the ontological argument: 안셀름)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두고 그 개념에 내적인 의미를 촉구해 나아가는 것이다. 안셀름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로 그는 하나님의 개념을 그 이상 위대한 분을 상상할 수 없는 실재라는 형태로 표현했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기에 그보다 완전한 분을 생각할 수 없는 실재이다.
1) 제1차 논증
어떤 것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과 마음 속 뿐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하는 것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세운다. 즉 더욱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는 마음속 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한다.
2) 제2차 논증
[프로스로기온]의 제3장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실재라는 새로운 형식을 말한다. 더욱 위대한 실재를 생각할 수 없는 실재는 진실로 존재하며 그런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성 안셀름은 1033년에 태어나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속해 있다. 그는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인간정신의 가능한 한에서는 자기가 믿고 있는 바를 모두 이해하여 이성적으로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진리를 이해하는데 우리의 이성을 적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비판> 성서적 신관의 왜소화, 하나님의 초월적 자유와 전승의 제한을 초래, 모든 존재증명은 이성을 수단으로 한다. 그러나 지식은 인간적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와 성령과 무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다. 존재증명에 인과율을 사용. 우리의 경험의 세계에 국한.
아퀴나스의 반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그것 이상으로 더 큰 것은 생각될 수 없는 그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논거를 하나님에 대한 직관의 진술로 생각하지 않고 논증이나 증명으로 생각 - 관념의 영역에서 실재의 영역으로의 부당한 진행이나 이행을 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이 그 이상으로 더 큰 것으로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로 생각되었을지라도 그러한 존재가 생각되어 있는 존재를 떠나서 즉 정신 밖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4. 우주론적 증명(the cosmological argument: 아퀴나스)
이 증명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특징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궁긍적인 실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징을 가진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의 대표격인 아퀴나스는 5가지로 증명한다.
1) 운동에 의한 증명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발견되어 성 알베르투스에 의해 사용.
우리는 감각적인 지각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으며 운동은 하나의 사실인 것을 안다. 여기서 운동은 가능태로부터 현실태에로의 이행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넓은 의미로 이행되며 토마스는 이미 현실태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하지 않으면 사물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동력자를 최초의 동력자인 하나님이라고 이해한다.
2) 작용인
감각적 세계에서 출발하여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원인이기 위해서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앞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최초의 작용인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3) 우연과 필연의 논증
어떤 존재자는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생성 소멸은 그 존재자들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존재자들이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항상 존재했을 것이며 생성하거나 소멸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필연적인 존재도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연적 존재이라면 아무것도 없는데서 어떻게 있게 되었을까? 따라서 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신이다.
비판> 왜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어야 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함. 만약 어떤 무엇이 존재한다면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존재가 왜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4) 가치로부터 절대적 가치 증명(Grading of Being: 존재의 등급)
이 증명은 완전성과 진리 같은 단계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물에는 나름대로 존재의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성의 단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최고 진리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비판> 먼저 절대적이며 자존하는 하나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증명해야 함
5) 목적론적 증명(아리스토텔레스적)
작용하는 무생물을 보고 있으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지향하는 결과라 토마스는 말하는데 이 무생물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을 움직여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지적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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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적론적 증명(the teleological argument: 윌리엄 페일리)
몸과 우주를 보면 너무 오묘하므로 반드시 이것을 만들고 계획하고 의도한 하나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피조물을 만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 페일리는 시계에 관한 유추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william paley는 데이비드 흄보다 30변 뒤에 나타났다. 그는 [자연신학: 혹은 자연 현상에 나타난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거]에서 이 논증을 제기 오늘날 특히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즐겨 다룬다. 시계의 존재 원인을 설계자로 보아 인간 창조의 근원을 신에게 두면서 설명한 것이다. 우주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와 같다. 해변에서 시계를 주웠을 때 이렇게 복잡한 시계가 바람이나 비와 같은 자연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이성이 있다면 이 경우에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키도록 시계를 만든 어떤 설계자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우리가 시계를 한번도 본 일이 없고 시계가 인간 지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지 못했다고 해도 시계와 세계의 유추는 그대로 성립할 수 있다. 시계가 정확하게 돌아가지 않을 지라도 만든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계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아직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제대로 우주가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우주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해도 우리는 우주를 만든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흄의 반증에 의해서 반박된다. 흄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이 논증을 비판했다.
비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설계되어 진 것 같이 보이게 마련이다. 이 세계의 모든 부분이 어느 정도는 서로 작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안정된 환경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은 일종의 질서와 적응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모든 생물을 계획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교한 작품으로 간주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질서가 반드시 의식적인 계획에 의한 질서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흄은 의식적인 계획의 대안으로서 에피큐레스의 가설-우주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유한한 수자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을 제창한다. 수많은 원소들이 일정한 시간 내에 가능한한 여러 가지의 결함을 하면서 움직인다. 그러다가 어떤 결합이 일시적이나 영구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질서는 곧 실제화되어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는 것과 같은 질서 있는 세계가 된다. 세계를 시계와 집과 같은 건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강력한 유추론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이낟. 우리가 비록 세계의 설계자를 추론해낼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설계자가 바로 기독교의 전통에서 말하는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주어진 결과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를 낳은 원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한한 세계로부터 무한한 창조주를 추론해낼 수 없다. 비록 자연속에 어떤 질서가 있다고 가정해도 여기서부터 오직 하나의 하나님이 있다고 추론해 낼 수 없고 온전히 선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완전히 지혜로운 하나님이나 무한한 힘을 가진 하나님을 추론해 낼 수도 없다. 이러한 흄의 비판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계획성에 의한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확고한 논증이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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