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덕에의 길 - 요한 타울러
완덕에의 길 - 요한 타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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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300-1361?) - 그의 생애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나 전설이 많다고 볼 수 있다. 타울러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제자로서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euse)와 더불어 14세기 독일 신비주의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타울러의 영성과 신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인식들과 그 시대의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14세기에 있었던 두가지 분열 사건이 그의 생애와 발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348-49년에 있었던 페스트질병의 확산과 1320년대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신흥 시민계층의 사람들은 집단적인 태도로 바뀌고, 영성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타울러의 메시지를 들은 청중들은 주로 "하나님의 친구들(Friend of God)" 이라는 지역적 단체였다.
이 단체는 영적 지도자들로서 점차 좋은 평판을 얻게 되어 사회격변의 시대에 함께 하나님께 가깝게 가야 할 필요를 느꼈으므로 내적 현신과 밀도있는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1314년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정식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엑크하르트를 만났고, 1년간의 수련생활과 3년간의 논리학 학습, 콜론에서의 "naturalia"를 수학한 후 나머지 2년간 연구를 위해 고향으로 왔다. 타울러의 저서는 논문이 아닌 것을 제외한 약 80편의 설교집이 서방으 영성사에 있어서 가장 계속적이고 광속하게 받아 들였고 영적인 지도자로서 자신이 거하는 도시와 사람들을 지도하는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변증학적으로 수도주의에 기초한 금욕주의와 대등하거나, 이것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영성을 설명했다. 그것은 초기 사회적 개인주의 형태와 유사하면서도 공동체에 기초를 둔 중세 말기의 도시와 주민들의 열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타울러의 생애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요한 타울러 박사의 생활과 생애]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한 평신도"가 성경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설교를 얼마나 신비롭게 가르쳤는지를 알게해주는 저서이다. 그의 설교집은 1498년 라이프찌히에서 출판된 후 여러나라로 번역되었으며 마틴루터도 그의 설교집을 읽었으며 그를 독일교회의 아버지라 칭송하였다.
타울러는 비록 많은 고난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를 따르면 마침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영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타울러, 그의 묘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실제 인물의 근본적 특성들, 즉 지적 깊이, 다정함, 중용, 명료함, 신비적 영성 등과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 이 묘비를 보면 그는 가냘픈 몸매에 숨김없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요한타울러는 22편의 설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관점 속에서(첫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원하시고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로 하나님이 매우 갈망하기 때문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일로 바로 "인간의 영을 비우고 예비하게 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사역을 이루실 수 있는 귀한 기반을 발견하시는 일이다. 둘째, 인간의 죄악은 두가지로 곧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이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웅덩이로 인간의 삶을 허비하게 만든다. 셋째, 인간이 매일 매순간 탄생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 영혼은 반드시 내면을 향해야 하며, 모든 영혼의 능력들이 전도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완전히 자신을 맡기시게 된다.) 여러 가지 영적인 통찰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 인간의 본성은 원죄라는 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데 이 독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아무리 노련한 사람이라도 그 잔뿌리를 완전히 찾아낼 수 없으며, 또한 이 잔뿌리를 모조리 제거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타락한 성향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드러난다.
속박으로 타울러는 다섯 가지의 속박을 말하고 있다.
1)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피조물을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으로 특히 인간에 대한 사랑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들은 많은 선행을 하며, 찬양을 하며, 경건한 책들을 읽으며,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즐기는 부류로 이것은 마귀가 그들을 자신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2) 자기애로서 이 사랑은 자기 만족을 가득 채워 주어, 자신을 놀라운 존재로 여기게 하며,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고 표현되어 있어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으며 반대하지 못하게 되어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려 든다. 이들은 자신의 위안들이 사라지면 공공연하게 비진리를 말하거나 교묘하게 하나님께 화를 내고 악의에 찬 행동을 한다.
3) 이성의 속박으로 이 사람들은 교리나 진리 등 영적인 사실들을 자신이 추론할 수 있는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들로 스스로 점잖은 체를 하며 무엇에든지 이성적으로 해석하며 그에 대한 의견을 내어놓는 바, 이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이들은 선행을 이루거나 내면 생활을 성장시키지 못하게 된다.
4) 영적인 만나를 추구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란한 방법으로 그것을 추구하여 그 속에 빠지고 머무르며 스스로를 포기하고서라도 이것을 소유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성에 따라 하나님을 붙잡았다고 여긴 것은 실상 자신의 즐거움이다. 만약 영적인 만나가 흐려지고 사라질 때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며, 전처럼 충실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제까지 섬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5) 자기고집으로, 이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 마음(뜻)대로 하려는 것으로 이들은 하나님 앞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로 많은 덕행을 하는 것보다 비록 행위나 업적은 미약할지라도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의 삶이 훨씬 아름답다.
환난으로 세속적이고 경박한 사람들이 쾌락과 재산 때문에 유혹을 받는 것처럼, 믿음의 증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자기 만족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유혹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영을 참으로 가난하게 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며, 사방으로 그것을 찾아 헤매이며,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이라는 곳에 정박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환난이 드러내며 그들이 정박해 있는 기반을 쳐부수어 버리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깨부수어 마침내 자신의 무가치함에 직면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 순수하고 단순한 신앙을 고백하게 만든다. 이것은 피조물에 집착하지 않고 피조된 것이 아닌 근원 그 자체와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혼에게 이러한 폭풍우가 밀려 오면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분이 평안이나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우리는 인내하며,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신을 위탁하며, 그것을 무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그의 은사들을 주실지 알 수 없기 때문으로 감정적인 만족감을 가지고 고귀한 덕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피난처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수백배 좋은 일이다.
이탈은 속박으로 부터 떨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은 "떠나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영 안에서 이성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들을 반성해보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추구하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활동 속으로 빠져다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기는 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탈은 참된 고결함을 초래한다. 이탈에는 두가지의 접근이 있는데 하나는, 성부 하나님의 부성적 탄생의 방법으로 자신의 신적 지성으로 자신의 내면을 향하셔서 분명한 자기관찰을 통해 자신의 영원한 존재의 본질적 심연을 꿰뚫어 보심으로 순수한 자기인식 행위를 통해서 성자를 낳으시는 방법이다. 그리고, 모성적 수태가 있는데 이는 온전히 거룩한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외부세계와 감각으로부터 이탈하여 행동과 사고 및 태도가 내면화되는 것을 말하고 내적인 정온과 평화를 창조하는 일, 즉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여 보호하며, 고요하고 내면적인 안식처를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밤의 고요함 속에서, 만물이 잠잠하고 완전히 고요할 때에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먼저 우리가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려면, 우리 속에 있는 피조물은 그것이 아무리 영적인 것이라 할 지라도 모두 비워야 한다.
자기부인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높은 영적 단계에 이르러야 하는데, 감정적인 만족감을 가지고서 고귀한 덕을 추구하는 자들이 영적인 열정과 위안을 느낄 때 쉽사리 발생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사들을 빼앗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것으로 즉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드러나는 것으로서 우리의 본성은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기부인은 이런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주어지는 즐거움을 버리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위해 자아를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 탄생한 후에는 애굽이라는 어두움 속의 포로 생활이라는 쇠사슬을 스스로 벗어 버리려 하지 말고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 하며, 표면적인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해방시킬 때까지 어두운 애굽에 그대로 머물러 우리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병기들로 무장하게 될 때까지 그곳에 있어야 한다. 이와같이 자신의 의지를 버린 사람들을 꽃피는 나사렛에 들어갈 수 있으며 거기에서 우리의 영원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내향성으로서 밖으로 향하는 모든 표면적인 것을 돌이켜 내면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내면적인 안식처, 즉 은밀한 영혼의 지성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의 충만한 연합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내면의 중심에 이르는 것으로 이 내면의 중심은 참된 하나님의 거처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하고 고독하고 지극히 고결한 곳으로서, 영원한 어두움이다. 감각의 길을 통해서는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다. 이곳에서 인간은 매우 고요해지고 근원적이 되며 매우 단순해지고 모든 것들로부터 이탈하여 순수한 상태에서 보다 높이 올라가며 모든 사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고귀한 영역 안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시고 역사 하시며 통치하시고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합일로 내면의 중심에 이른 영혼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룬 것으로 이곳에서 피조된 영은 그가 영원 전부터 거하였던 피조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태어나며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알고, 신적인 수준으로 높아지며, 그의 피조물 됨 속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은 완전히 하나님을 만나고 신적 생명 그 자체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다. 이런 사람은 내면적인 일과 표면적인 일을 하지만, 자신의 본질과 생명이 존재하는 곳, 즉 그들이 활동하고 머물게 되는 감미롭고 조용한 내면의 중심 속에 항상 머무른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서는 오직 거룩한 생활만 발견되게 된다. 이들의 행동과 행위와 생활은 모두 거룩하다. 그들은 만물에게 생명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인간에게는 위안을 주는데 그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그들 안에 거하신다.
성령은 피조물인 우리가 알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영적 실재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려 할 때는 성령께서 영혼 안에 그 자리를 예비하셔야 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또한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스스로 그곳에 거하셔야만 한다. 사랑이 풍성하신 성령은 우리가 피조물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들 각자에게 임한다. 우리가 그렇게 행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께서는 모든 은사들을 가지고 임하셔서 우리 영혼의 은밀한 곳, 가장 깊은 중심에 이르기까지 흘러 넘치도록 주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영향력과 조명에 의해서 우리를 권면하시며, 분발케 하시며, 힘을 주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작용들을 동일하게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역사를 느끼고 그의 임재를 맛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표면적인 평온한 종에 자신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먼저 성령을 알게 되고, 성령도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성령을 알게 되는 분량은 우리가 성령에게 얼마나 감화 감동되느냐에 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성령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한다.
참된 기도는 전심으로 하는 기도로 이것은 산만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의 모든 힘을 집중하여 그것들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시편이나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또는 우리의 생각을 제멋대로 뻗어가도록 내버려 두고서 드리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근행이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훌륭하 듯이 보이지만 신령으로 기도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주저말고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가 순수하고 효과적인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모든 덧없고 표면적인 것들, 즉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말을 절제 있게 하고 행동을 흠 없이 해야 하는데 이것이 참된 기도를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타울러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기독교의 영성을 제시하였으며, "영에 대한 인식"을 아주 효과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모든 표면적인 활동을 거부하고 자기 부인이라는 혹동한 과정을 거친 후에 주어지는 우리의 텅 빈 곳이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해 새 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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