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저주 (마21:18-19)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이 새벽에 성 안으로 들어오시다가 시장하셨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섭섭하여 이내 그 나무를 저주하였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습니다. 인자하신 예수님이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였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 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맺어야 할 열매들을 맺지 못하면 그 사람은 대우도 받지 못하거니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저와 여러분에게 크고 충격적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1. 길 가의 무화과나무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가에 선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보통 1년 중 6월과 9월에 적어도 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때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신 것으로 보아서 유월절이 있는 4월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막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1)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전에 열매를 맺습니다. 꽃이 없다 해서 무화과(無花果)라고 부릅니다. 혹 어떤 나무는 잎과 함께 열매를 맺기도 하고 잎이 막 나면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열매가 먼저 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한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무화과의 계절은 아니었지만 잎이 그처럼 무성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열매가 있어야 마땅한데 불행하게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잎이 무성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분노와 저주를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은 완전한 사기입니다. 겉모양은 그럴듯한데 실속이 없는 것과 얼핏 보기에는 있어 보이고 말은 번지르르 한데 사실상 내용이 없는 것은 다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거룩하게 예배는 드리는 것 같은데 행함이 없는 것은 다 거짓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결코 용납지 않으십니다.

(마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23:5-6)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2) 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있었습니다.(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길가에 있는 나무는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는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불리 울 만큼 주인이 따로 없고 누구나 따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길 가다가 시장한 사람이 따먹을 수 있는 것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서 하나의 무화과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있었고, 모든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 있었고, 또 잎이 무성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믿는 성도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무화과 열매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차라리 길가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예수쟁이'라는 딱지가 없었더라면, 이런 변고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못살면 예수쟁이 아무개, 아무개집사가 그런다고 예수 욕부터 합니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2. 열매 없는 나무

1)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무익한 것입니다. 나무가 아무리 크고 좋아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그 나무는 제목을 하거나 공예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겨우 화목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쓸데없습니다.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2)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이 없을 때 주님은 심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 경건의 모양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경건의 능력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즘에는 조화(造花)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모양은 물론 심지어 냄새까지 생화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조화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열매입니다. 조화에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신자는 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냄새가 있고 열매를 맺습니다.

(고전4:19-20)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3) 지금도 예수님은 시장하시다는 교훈입니다.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예수님은 지금도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들에게서 열매를 찾고 교회에서도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히딩크는 우리나라가 축구 8강하고 나서 기자회견에서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라고 하였습니다. 못 먹어 배고픈 것이 아니라 바람이 크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만족하고 칭찬하는 나무되시길 바랍니다.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나무의 운명 (19절)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1)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자라는 3대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이 무화과는 바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상징하고 또한 성도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열매로 가치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열매를 잘 맺는 무화과나무가 좋은 나무입니다. 아무리 나무가 크고 잎이 무성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훌륭하고 좋다고 할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나무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막13: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2)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우리는 때때로 오늘 보다는 나중에 차차 하지하는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지만 생각지 못한 때 주님이 오셔서 샘하게 될 때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른 심판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죽음도 연습이 없습니다. 기회가 지나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마24:50-51)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3)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의 추상적이거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비유는 실제와 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비유든 비유가 아니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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