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눈으로 보는 성서」


새로운 눈으로 보는 성서
국내도서
저자 : 데이비드 R.오르드 / 강우식역
출판 : 바오로딸 200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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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과연 진리인가? 성서는 어떻게 탄생 하였는가? 이 시대에 성서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커다란 주제에 맞추어 다른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기를 유도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하여 성경을 바라 볼때 역사적 사실이나 단어 하나에 진리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속기 언어와 긴장 언어라는 설명을 통해서 이야기에서 단순한 단어의 뜻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고 풍부한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성경은 후대 편집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우리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성경은 그들의 삶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때론 자신의 입장의 옹호하고 입지를 굳히기 위해 성경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벗겨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비유로 말하고 있는 성경을 단순히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파악이 아닌 그 본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록당시의 다양한 사회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고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성경에는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걸림돌은 올바른 교훈을 파악하기 힘들게 한다. 또한 이런 걸림돌은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삶의 문제들에 제시하는 해결책들이 단순히 종교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영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성경 해석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언어학적, 수사학적 기교 연구를 포함한 본문의 문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여러 시대에 여러 언어로 또 그 당시 많이 사용되고 가장 발달된 기법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헤매고 말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한 깊은 관찰과 연구가 없다면 왜곡된 성경 해석을 낳는 것은 당연한 결과 일 것이다.

저자의 말 대로 ‘책임감 있는 대화를 나누기 전에 눈과 귀를 열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항상 문제삼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과거의 통찰력을 다듬고 그 위에 새롭게 쌓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나가야 할 것이다. 성경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기존의 잘못된 관습과 습관처럼 성경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항상 잘못된 성경 해석을 가져올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각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협한 생각들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완벽한 삶의 지침서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있는 많은 문제들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덮어 두길 원한다. 이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성경의 권위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 문제를 둘러싸고도 많은 논쟁이 있다. 하지만 정통적인 입장을 따르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을 훼손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의 완벽한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한숨에 다 쓴 것이길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은 오랜 시간 여러 시대를 거쳐서 기록되어졌다. 그 시대의 상황이 성경에 방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한다. 이유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게으름은 성경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게으름을 이 책의 저자는 채찍질하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 다른 시각으로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바라보길 권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상당부분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너무 많은 부분 성경의 틀을 없애버리고 말았다. 울타리가 없다면 길과 안마당을 구분하기 힘들어 진다. 상당히 많은 부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 다원주의로 자칫 하면 흘러들어 갈 수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본문과 예언을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그의 신성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마태의 생각에서 만들어진 창작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생각과 주장이 만들어낸 하나의 소설이나 찬양의 글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고, 그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유일한 하나님을 거부한다. 니체의 말처럼 갑자기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욕심이 많고, 시기심이 많고, 난폭하며, 독불장군인 하나님으로 밖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성서를 마치 규칙들로 이루어진 지침서인 양 문자 그대로 천진난만하게 읽기 때문에 삶의 혼돈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라는 저자의 말은 참으로 극단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솔직히 저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많은 혼란을 가지고 온다.

더 이상 성경에 어떤 힘도 실을 힘을 상실하게 만들고 더 이상 성경의 권위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성경에 포함한 어떤 상반된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설화나 이방 종교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전반부를 거쳐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성경은 오랜 시간과 장소와 그 때에 맞추어서 기록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자의 의도에 맞는 부분도 있는 방면 그 반대도 있다.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다면 사실이 부분도 있으며, 역사적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반대로 역사적인 부분도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은 그 줄거리가 중요한 부분이 있으며 또 어떤 부분에 가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중요한 신학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있어서 숫자는 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숫자를 통해서도 설명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기교는 구전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이해를 요해야 했음 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시각만을 절대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분명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내다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의 많은 목욕물을 버리다 보니 아기를 돌보지 않고 목욕물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들을 마련하면서 발전해 왔다. 더욱이 지금에 와서 성경 해석을 하는데 기존 보다 억지나 자기 입지를 굳히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현 시대의 독자들을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성경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은유나 비유로 해석해도 안 될 것이다. 그 문학 장르에 맞게 그리고 저자의 의도와 신학적 주제에 맞는 성경 해석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각 권별로 성경은 나누어져 있고, 그렇지만 각 권별로 나누어진 성경은 따로 놓고 해석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성경은 아무런 지침도 교훈도 감동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차라리 요즘 우리에 입맛에 맞는 소설책이나 영화를 보고 그 가운데 교훈을 찾고 삶의 지표를 찾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일 것이다. 생소한 언어와 문화와 생활 모습을 담고 있는 이국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고, 감동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을 봐야 할 때도 있고, 그 산 가운데 있는 나무들을 발견하는 일도 필요하다. 너무 하나 만을 고집한다면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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