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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성례전의 다양한 참여 형태에 대해 논의한 글입니다. 성례전의 역사와 전통적인 방식, 현대 교회에서의 참여 방법을 비교하며, 개혁교회가 성찬 성례전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할 필요성에 대해 다룹니다.

 

성찬 성례전의 참여 형태는 한 가지 뿐인가요?!

 

우리의 땅에 복음을 심어준 선교사들을 통, 기존에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례전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선교사와 순회가 있을 때에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또한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 다음으로 소중하게 받아 전수 해 왔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전통이 되어 조금의 변화로도 시도하여 "신신학 또는 자유신학"이라는 이름과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우리와 다른 예배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성례전 모습

 

Q. 성찬 성례전에 회중은 앉아서 분병 분잔 위원들이 가져다 준 것을 받아먹는 방법이 모두인가요?
A. 우리는 성찬 성례전을 일년에 두 번 정도 행하고, 참여의 형태는 지금껏 성찬의 분병 분자 때 회중은 제자리에 앉아 있고 분병 분찬 위원들이 가져다주면 받아먹는 것만이 성경적인 진리라고 믿어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개혁교회의 진리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매우 편협된 것이고 예배 역사이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성례전에 성물을 받은 형태는 종교개혁자들의 의하여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쯔빙글리의 방법으로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가져다 준 떡과 잔을 받도록 하는 형태이고, 둘째는 칼빈의 형태로 침례교인 들은 모두 일어서서 경건히 받도록 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때로는 성찬대 앞으로 모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받는 방법 등을 택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긴 성찬 테이블이나 또는 찬양대 석에 사도의 숫자처럼 12명 씩 나와 앉아서 받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개혁자들에 따라 성찬성례전의 집례와 수찬의 형태는 다양하였다.

 

Q.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교리에 어긋난 일인가요?
A. 성찬 성례전의 역사를 이해하다면 이제는 우리도 앉아서 가져다주는 것을 받는 형태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사도와 것처럼 좀 더 다양하게 성찬성례전에 참여하는 형태를 갖추어 볼 필요가 있다. 좀더 신선하고 성스러운 성례전을 가져야 함을 그토록 강조했던 칼빈이나 낙스의 가르침도 예배의 현장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Q. 동남교회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성공회와 루터교에서는 회중들이 나아가서 무릎을 꿇거나 서서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는데 개신교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요?
A. 최근 한국에서도 예식서에서 자주 성례전을 갖도록 제시하면서 그 집례와 수찬의 형태를 다양화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장복 교수는 이러한 형태를 우리의 교회도 성숙하여 그만큼 발길을 내딛는다고 말하고. 여기에 호흡을 함께 하는 신선한 방법의 시도가 마땅히 있어야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침신대 교수 도한호 교수는 마태복음 26장 28절 말씀을은성찬식이 사죄를 보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찬의 포도주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예수)의 피"를 성장한다는 의미이며: 요한복음 6장 51절~58절은 49절의 "만나"와 비교되어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 곧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한다.

성찬이나 성례전의 사효성에 의한 개인의 믿음에 상관없이 참여하는 이에게 영생을 얻기 위한 공적을 쌓아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보고 이로 미루어 성찬 성례전은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지 구원의 요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형태는 더 성스럽게 주님의 희생을 재현하고 거기에 깊이 참여하는 형태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여러 방법을 모색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정장복. [그것은 이것이다], (서울: 예배와 아카데미, 1999), pp.92-94.
  • 도한호. "개신교 예배의 위기", [복음과 실천], 제14집(1991), pp. 86-87.


주일 예배를 위한 대표 기도문 작성법과 예시.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해 성경적 기초를 담은 기도로 예배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주일 예배를 위한 효과적인 대표 기도문 작성법과 실제 예시

 

주일 예배는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대표 기도문은 예배의 흐름을 주도하며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대표 기도는 단순한 형식적 의무를 넘어, 진심 어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는 중요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효과적인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을 작성하는 방법과 실용적인 예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대표 기도문
아기 예수 앞에서 두 손 모아 경의를 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대표 기도문 작성의 핵심 요소

  • 감사와 찬양: 기도문은 예배의 시작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권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표현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산성이시며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주일에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하시고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성경적 기초: 기도문의 내용은 성경에 기초한 표현이 포함될 때 더욱 힘이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문을 구성하면, 더욱 의미 있는 기도가 됩니다. "시편 46편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심을 믿습니다."
  • 현재의 필요와 상황 반영: 기도문은 단순히 전통적인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교회와 성도들이 직면한 도전과 필요를 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시대가 어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대표 기도문 예시

우리의 산성이시며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거룩한 주일에 주의 백성들을 생명수의 강가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백성이 모여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예배드립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생이지만, 주님의 동행하심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힘을 얻게 하시고,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저희가 기도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한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죄로 인해 세상이 황폐해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의 부족함을 용서해 주시고, 이 땅에 긍휼을 베푸사 회복과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을 깨뜨리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군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을 닮은 삶으로 변화되어,

무너진 진리를 다시 세우고 성경적 가치관을 수호하는 거룩한 방파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국가의 지도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고, 그 길을 주관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군대로 보호하시어 모든 위협과 안전사고를 막아 주시고, 주님의 평강이 온 세상에 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나라와 세계가 혼란과 갈등, 전쟁의 위협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힘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위기 속에서도 주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목사님과 사모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를 섬기며 헌신하시는 두 분에게 건강과 성령의 충만함을 더하시고,

그들의 간증이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이제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성령의 음성으로 듣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옵소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결단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찬양과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시고,

헌신하는 모든 손길에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거하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과 찬송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표 기도문 다운로드

아래 기도문을 다운로드하셔서 자유롭게 활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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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작성 시 피해야 할 일반적인 실수

  • 복잡한 표현과 과도한 길이: 기도문은 듣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진솔한 언어로 작성해야 합니다. 너무 복잡한 표현이나 과도하게 길어진 기도는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 형식적인 언어 사용: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어려운 단어보다는 평이한 언어가 성도들에게 더 잘 다가갑니다.

 

손 위의 비둘기 모습

 

주일 예배의 대표 기도문은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하나로 묶고 예배의 시작을 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진정성과 성경적 기초를 담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작성하면 예배의 깊이가 더해질 것입니다.

 

기도문을 작성할 때는 성도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언어와 시대의 필요를 반영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운 대표기도문을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주일예배 대표기도문 모음

 

수요|구역 대표기도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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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목사가 세례를 다시 받는 문제와 침례와 세례의 의미적 차이에 대해 성경적, 교리적 관점에서 논의합니다. 세례와 침례의 원어적 의미를 해석하며, 교회의 세례 관행과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침례 모습

 

목사가 세례를 다시 받은 사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교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있다. 그리고 그들 교파마다의 주장하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본서의 문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본서에서 말하는 문제, 즉 장로교 목사가 침례교 목회를 위하여 침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 동시에 침례교 목사가 장로교 목회를 위하여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먼저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침례와 세례라고 부르고 있는 두 명칭의 차이일 것이다. 침례(浸禮)라고 번역하느냐, 세례(洗禮)라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사활을 결정하는 큰 문제가 아니다.

 

침례나 세례나 모두 동일 한 헬라어 (βαπτιζω)를 번역한 것으로 ‘잠그다'의 의미 외에도 '씻다', '정결케 하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에서 어떤 단어로 사용하는가 보다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줄 때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물을 약간 뿌리고 손바닥에 물을 묻혀 머리에 얹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선포한다. 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서 죽었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푼다.

 

침례의 의미도 동일하다. 베드로는 세례를 홍수에 비유한다. 곧 우리가 물을 통과하여 구원받았음을 말하면서 물의 위협적인 상징성을 생각나게 한다(베드로전서 3:21).

 

메러디스 클라인은 세례의 물을 씻음만이 아니라 심판의 물로도 볼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고전 10:2).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세례의 물을 죽음의 물의 위협에 비교한다. 홍수의 물, 애굽 사람들을 뒤덮은 그 바다의 물과 비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롬 6:3-5).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물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우리를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해변으로 데려다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벧전 3:18-21). 즉 세례(침례)의 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심판을 나타내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타낸다. 행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나타내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타낸다.

 

만약 형식에 대해서 반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과연 당신의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때에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려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단지 교단의 고집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례와 침례란 단지 번역과 형식의 차이이지, 의미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번역과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의 교회도 그 세례(침례)의 형태가 어떠했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침례)를 서로가 인정하여야 하고, 그 신앙이 성장하도록 돕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세례는 흐르는 물에서 주시오. 그렇지 못하면 받아 놓은 물에서 주시오. 물이 차면 따뜻이 데워서 하시오. 아니면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 위에 물을 부으시오.” - 디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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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성경적 관점에서 침례가 언제, 어떻게 예배 중에서 가능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침례의 중요성과 목회적 실천 방안을 다루며 감격스러운 구원의 순간을 강조합니다.

 

침례는 어느 예배에서도 가능한가? 성경적 관점에서 본 침례의 중요성과 실천 방법

 

 

침례 클립아트

 

침례는 언제라도 가능한가?

요즘은 날로 시대가 발전되고 변화됨에 따라 많은 목사님들은 신선한 목회를 위하여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 가능성과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침례를 베푸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이 행사에 대하여 많은 의견들이 있다.

 

과연 이러한 시도가 보수주의 많은 교인들의 시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도 과거에 행하지 않았던 것인데,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새롭게 시도할 때에는 대단한 거부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옛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교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에 많은 목회자들을 진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경과 신학에 근거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마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지금 시행하고 있는 성경적 침례는 목회자가 부족했던 시절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한 관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성찬과 침례를 따로 이루어져도 무방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많은 교회가 이것에 대하여 그리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리하여 많은 침례문답, 공부, 침례, 성찬까지 한꺼번에 갖기 위하여 두어 시간을 소요하는 일은 무리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행하는 성례전을 진행하면서 교인들에게 감격을 주는 대신에 지루함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지루하게 할 바에야 여러 시간을 나눠야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또한 침례식은 많은 교회에서 분기 또는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베푸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52주 어느 주일의 낮 또는 밤 예배 시간에 베풀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 사람이 구원의 감격과 체험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시간에 다른 회중 앞에서 신앙간증을 하고 그다음시간에 바로 교회의 침례탕에서 침례식이 베풀어진다. 침례식이 베풀어지고 나서 다른 많은 회중들이 진심으로 축하하고 한 사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며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미국 교회에서 그 장면을 보고 "과연 저것이 침례식이구나!" 하는 것과 나도 그 구원의 감격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구원의 감격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다른 회중들에게 증거하고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본인이 죄악된 삶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기를 원한다는 증거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침을 받고 생명책에 이름을 올라가는 귀한 감격의 시간이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도 나타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높은 관리 내시가 빌립의 복음을 듣고 진리를 깨달은 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 침례 받기를 원하자 빌립은 지체 없이 침례를 준바가 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기쁨과 감격을 무시한 체 분기별 또는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침례를 준다. 그 방식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감격이 있을 때 수시로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침례란 단순히 교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탄생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의 일원이 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시기이다.

 

만약에 한 사람이 구원의 감격을 깨닫고 침례를 받겠다고 준비하다가 그 과정의 복잡함과 긴 시간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임종을 맞이할 수도 있다. 물론, 침례 여부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품에 안기겠지만 침례를 받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침례 받기를 원하든 사람들에게 신앙의 정도를 검검하고 일정한 교육을 시켜 지체없이 침례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언제 어느 때든 침례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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