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초기 선교 배경에 대하여"

 

목 차

 

I. 서론

 

II. 개신교 선교 초기의 대체적 상황

 

1. 국내적 상황

1) 정치적 배경

2) 사회적 배경

3) 종교적 배경

 

2. 초기 선교사들의 사역

1) 출판 및 한글보급

2) 교육 및 의료

3) 악습개혁과 민족사상 고취

4) 네비우스 정책

 

III. 한말의 상황과 개신교 선교 및 교회성장과의 관계성

 

1. 정치사회적 혼란

2. 종교적 혼란

3. 선교사들의 선교유형

 

IV. 결론

 

* 참고문헌

 

I .서 론

1.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보통 150년 혹은 20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늦게 소개되었으나 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한국의 기독교는 급속도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동일한 문화권이면서 유교적 가치를 공유함에도 유독 한국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룬 배경에 대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거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선교를 받던 입장에서 오히려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고 거듭났다. 침례 교단만 하더라도 50개국에 총 608명이라는 선교사(20082월 기준)를 파송하고 있으며, 앞으로 2010년까지 100 종족에 1,000명의 선교 파송을 비전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이처럼 역동적으로 기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고, 혹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선교지를 집중 공략할 수 있다면 보다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정착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글은 토마스 선교사가 성경을 싣고 제너럴 셔먼호로 한국에 들어오고자 했던 1866년을 시점으로 해서 1910년 일제 침략에 의해 조선 왕조가 멸망하기까지를 초대 선교 배경으로 보고 초기 국내 상황과 초기 선교 사역을 살펴보고 초기 선교 사역이 한국과 교회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I. 개신교 선교 초기의 한국의 상황

 

1. 국내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고종 1) 일본 군함 운양호 사건으로, 그 이듬해인 1876년에 한일간에 맺은 강화도 조약이다. 이 조약이야말로 한국이 중국 이외의 그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을 없었던 관행을 깨고 중국 이외의 제3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근대 한국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로 기록된다. ‘병자 수호 조약은 한국이 이제 세계에 그 문호를 개방한다는 의미로서 세계와의 관계정립이라 계기도 되었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첫 단추가 끼워진 일이기도 하다.

일본과의 조약 후 기타 여러 나라들과 조약이 이어졌는데 그 중 첫 번째가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은 한국이 이제 서양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시켰다. 이것은 개신교 선교에 중대한 전기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개신교 선교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개화당의 수령격인 김옥균은 철저히 불교신자였으나 서양의 부강이 기술문명에 기초하고 있고 그 문명의 뿌리에 기독교가 있음을 통찰하고 기독교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김옥균은 맥클레이 박사 부부가 18846월에 고종에게 교육 및 의료선교 윤허를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호개방을 통하여 외국인은 치외법권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입국하여 제한적으로나마 선교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정부의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외교관계는 선교사들이 법적 제약을 어느 정도는 초월하여 선교하게도 하였다.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조약상으로 전도의 자유가 없었고 한국정부는 척외법을 강조하여 전도행위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척외법은 1890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효력이 상실되었고 전도활동이 공공연히 수행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에서의 세력균형의 유지를 위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인명과 재산상의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국토가 유린당하는 수난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청일전쟁은 한국인의 사상적 방향을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향케 하였다. 민족의 수난기에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그 원인은 당시 교회가 민중의 도피처로 이해된 데 있다.

 

2) 사회적 상황

청과 일본, 우리나라를 비교하면 한국을 가장 불결한 나라로 보았다. 가령 의사 알렌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집 대문 곁에 퇴비를 보고 역겨움을 경험했다. 그는 "조선이 오물과 악취의 나라라는 씻을 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고 술회하였다. 불결할 뿐만 아니라 빈곤한 나라였다.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였던 힐리어(W. Hilliar)경은 빈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토착자본의 결여와 토착상업의 부재, 둘째는 관리들의 착취와 산업의 부담, 셋째로는 농사군과 일군들의 일할 의욕의 상실인데 그 까닭은 애써 일해 생산한들 필경은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려 다 착취될 터인즉, 꼭 호구(호구)할 정도의 최소한의 양 이외에는 생산할 의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들어 올 때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봉건적 의식에 의한 계급차별, 여성천대, 봉건적 구습들이 있었다. 나라의 경제는 도탄에 빠져 있었고 질병은 만연되어 있었던 혼란기의 모습들이었다. 특히 계급차별로 인한 사회질서는 기독교의 만민평등설과 대치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3) 종교적 상황

기독교가 한국에 선교될 무렵, 한국에서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다.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라는 외국인들과 선교사들의 기록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교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무교, 불교, 유교 등의 종교들이 있었지만, 어느 하나도 민족 종교로 정착되지 못했고, 그 시대에 따라, 정권에 따라 종교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오히려 이 혼란이 기독교가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도, 중국, 태국, 몽고 등 아시아 제국의 선교가 어려웠던 것은 그 곳에 수 천년 내려오는 민족종교가 굳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혼란과 경제의 파탄으로 백성들은 희망이 없었고, 특히 종교마저도 천시를 받고 있었다. 유교는 부패한 양반과 관료들의 종교로 머물러 있는 지배층의 종교였고 백성들의 종교는 아니었다. 불안한 백성들에게는 길흉을 점치는 민간신앙에 오히려 의지하였던 시대였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천심이 인심"(인내천),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동학의 사상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미래에는 억압받는 민중이 복을 누리고 지배층이 몰락할 것이라는 지상천국설의 반봉건적 지향을 담고 있었다.

 

2. 초기 선교사의 사역

 

개신교 한국 선교초기의 배경 중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사역일 것이다. 선교사의 헌신적인 선교활동과 정열이 바로 한국교회의 초기 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중에 공통적인 요소는 그들이 직접적인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구한말 직접적인 복음사역보다는 간접적 선교 사업이 더 일반 대중에게 큰 의미를 주었다. 그 중에서도 의료, 교육, 출판, 사회개혁은 초기 기독교 성장에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전에는 선교사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토착인들 보다 자국의 이익을 더 앞세우다 토착인의 반발을 사야 했던 선교사와는 비교된다.

 

1) 출판 및 한글보급

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성경보급에 대한 강한 열의가 있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통역 겸 안내자로 온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의혹과 찬사가 엇갈리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죽기 전 중국 성경책을 전한 것만은 사실이다. 1907년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어느 사람이 선교사에게 성경책을 주며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토마스 목사가 죽을 때 얻은 성경이다"라고 한다.

1882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선교사 로스(Ross)목사가 만주에서 맥킨타이어(McIntyre) 목사와 한인 이응찬과 함께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번역 출판하였다. 백홍준(1848-1893)에 의해 1883년부터 성경반포가 비밀히 시작되었고, 그 후에는 서상륜에 의해 매서 전도가 시행되었다. 1887년에는 첫 한국어 신약성경을 완역하여 '예수셩교젼셔(Ross Version)'라고 하였다.

1884년에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본은 미국 성서공회에 의해 18852월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발간되었다. 이것을 언더우드 선교사가 내한하면서 갖고 오게 된다. 1887년에는 [성경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900년에는 신약전서를, 1910년에는 구약전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성경을 중요시 여김으로서 성경번역을 하고 한글을 보급함으로서 일반대중들도 쉽게 기독교에 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준 것이다. 구한말, 기독교의 신문, 출판사업과 성경 보급은 무지한 일반대중을 일깨우는 귀중한 도구가 되었고 이는 기독교에 호감을 갖도록 인도하였다.

 

2) 교육 및 의료

한국에서의 근대교육의 시작은 선교사들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언더우드는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현대식 교육이 비롯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는 메리 스크랜튼여사가 세운 이화학당이다. 아펜젤러는 미국 대리공사 포크를 통하여 한국 정부에 영어학교의 개설을 청원하는 서신을 보냈다. 정부는 곧 이 청원을 허락하여 18866월 학교를 시작하였다. 1887년 고종은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좋은 일꾼을 많이 길러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사립학교는 1910년에 2,250여개 였으며, 그 가운데 신구교가 합해 796개 학교가 기독교 개통의 학교였다. 이것을 볼 때 교회가 사회교육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맬 때, 알렌(H.N.Allen)이 치료하여 낫게 되었다. 이에 정부와 왕실의 신임이 두터워져 알렌의 제의에 따라,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한국은 날씨가 더워지면 전염병이 창궐하고, 위생 관념이 부족한 사람들은 물을 끓여 먹지 않아 전염병이 돌면 온 가족이나 동리가 몰사하기도 하였다. 1885910일에는 스크랜튼(Scranton)에 의해 민간병원이 설립하게 되었다. 또한 남녀가 내외하던 시대에 남자 의사들이 여자를 치료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는데 1886년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여자 간호사인 엘러즈가 입국하여 제중원에 부녀과를 설치하고 부녀자들을 치료하였다. 1890년경 이후에도 인천 평양 개성 대구 부산등지에도 선교병원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학교와 병원은 서양인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고 서양문물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3) 악습개혁과 민족사상 고취

서양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볼때 구한말의 한국의 풍습에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요소가 많았다. 자연스레 기독교는 악습 개혁의 중심이 되었고, 먼저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미신타파에 앞장섰으며 유교적인 결혼관을 바로잡아 여성의 인권을 개선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일으키는 사회 악습의 개혁 그리고 여권신장과 같은 운동은 적극적인 사회 개혁운동이었고 사회의 불의와 싸우는 운동이었다. 이에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개혁적인 자들을 포용하고 있게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가능한 한 정치에서 손을 떼었으나, 그 이전에는 한국과 한국 정부를 적극 도운 사실이 있다. 예를 들어 카스라 테프트 조약이 체결될 때,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고종의 이 조약의 무효를 요구하는 친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에게 갔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4) 네비우스 정책

존 네비우스는 1890년 봄 당시 한국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20대 청년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초청되어 그들과 같이 일련의 선교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취한 선교정책은,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ragation)이다. 즉 자립이란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한다는 것이며, 자치는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전(자전)이란 한국인 스스로 경제적 부담이나 운영 등을 맡음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선교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 선교정책을 채택하여 실천함으로서 신자와 교회의 증가에 한 몫을 담당했다. 긍정적인 면으로 독립성을 강조하여 자립, 자치의 민족교회의 틀을 형성케 했고, 둘째 하층민 전도와 초등교육을 통해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책임적 존재를 일깨워 근대 시민 의식형성에 기여했다.

 

한국의 문고리 이미지
문고리 이미지 @ Image by peter jung from Pixabay

 

. 한말의 상황과 개신교 선교 및 교회성장과의 관계성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선교사들이 놀라고 염려할 정도의 성장을 보였다. 그렇다면 한국이 이렇게 빨리 개신교를 수용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신앙적인 요소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개신교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본 장에서는 개신교를 급속도로 성장하게 하고 한국인들이 개신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몇 가지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치사회적 혼란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개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혼란속에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아직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런 혼란이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선교의 문을 열게 하였다.

18849월에 장로교의 알렌(H.N. Allen)이 의료 선교사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는 고종에게는 선교사의 신분을 속이고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공사관과 기타 외국 공사관의 의사 신분으로 입국하였다. 그러던 중 1884124일밤 자객의 칼에 맞은 수구파 대신중의 한사람 민영익을 알렌(H.N.Allen)이 치료하여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알렌은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고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고종이 알렌에게 선교의 윤허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이 기독교의 순조로운 선교사업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 한국에 개신교가 1898610일 선교의 윤허를 얻어내고, 1895년부터 1907년까지는 급격한 수적 증가를 가지고 온다. 이러한 증가를 가지고 온 계기는 1895년에 있은 청일전쟁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청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인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각성을 한 대중은 서양의 문물제도가 우수하다는 생각이 생기게 되어 서양인의 종교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로 들어온 것은, 특히 상류층의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보다는 선진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개화와 구국의 방편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1904년의 러일 전쟁까지 이어졌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은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일본은 이제 한국을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벌인다. 이 때 유일하게 도움을 받고자 했던 곳이 교회였다. 당시의 기독교 학교는 민족교육을 시켰고 일본도 이러한 기독교학교에서의 강한 민족교육과 그 정치화에 신경을 몹시 썼다.

고종은 190511월에 헐버트(H.B.Hulbert)선교사를 통해 미국 백악관에 친서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민족정신들이 교회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청년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계속 국권회복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이 신앙보다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을 선교사들이 두려워했다.

개신교가 급성장한 사회적인 요인 한 가지를 더 들면 '개인적인 안전대책을 강구'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한국 지방 관리들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보고, '관가의 착취를 당하고 억압아래서 살던 사람들이 개인적 안전을 도모하는 방위수단으로 선교사와 그들이 전하는 종교로 전향하기도 하였다.' 영적인 갈망으로 입교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였다. 개신교의 급성장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숫적 성장을 이룩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나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백만명 신자화 운동"은 비기독교인을 개종시키거나 교회의 큰 성장보다는 이미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의 영적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종교적 혼란

 

근대 한국은 종교적으로 공백상태에 있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이미 조선조 전기부터 억불책으로 인하여 쇠미해져서 서울 시내엔 무당과 함께 승려를 천시하여 출입이 금지 되다시피 되었다. 그리고 유교마저 이미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민으로 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기독교 선교에 준영향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볼 수 있는데, 소극적인 면으로는 재래 종교의 약화 현상이 한국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적극적인 면으로는 그러한 풍부한 종교적 배경에서 형성된 한국인의 심성이 새 종교인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공헌 하였다. 즉 한국인들은 지금까지의 여러 종교가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 줄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선교사들의 선교유형

 

개신교가 선교의 윤허를 얻고,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의 자유를 먼저 찾으려 하지 않고 교육과 의료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베풀므로 선교자유의 윤허를 얻어 내었던 것이다. 알렌은 '광혜원'을 통해 고위층을 대상으로, 스크랜튼은 '시병원(시병원)'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의료사업을 펼쳤다. 또한 스크랜튼 부인은 '이화학당'을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이러한 헌신이 선교의 자유와 함께 급속한 성장을 가지고 온 원인이 되었다.

 

IV. 결론

 

지금까지 한국 초기의 선교 배경을 통해서 개신교가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발견하게 된다. 국외적으로는 조선 정부가 더 이상 쇄국정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대원군일파가 민비 일파에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분명히 과거와 같이 서방문물을 무조건 반대하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국외정세가 바뀌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 더욱 더 커진 상태이기 때문에, 고종의 아관파천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것은 외국의 세력을 막고 터부시 했던 이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배경을 보여준다.

국내적으로는 사회개혁적인 집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기반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또 출세에 목적을 둔 사람들도 영어와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독교를 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점점 나라의 기운이 기울자 일단의 애국지사들은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선교사의 영적인 열심이 있었고,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구령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성경번역, 한글보급, 의료, 교육, 사회개혁 등을 통하여 일반 민중들에게 이미 친근하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교파별로 분열하지 않고 협력하였으며, 네비우스 선교정책도 한국 기독교 정착에 한 몫을 했다.

이 모든 것을 다시 종합하면 유독 한국에서만 기독교가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요소가 잘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즉 로마팍스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처럼,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초기 한국은 과도기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서양인의 종교라는 오해와 거부감 없이 오히려 쉽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워졌다. 그 이유가 국가적,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 필요에 의해서 교회에 발을 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역사하심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라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믿는 신자로써 철저히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오늘 날의 한국 교회로 성장시켰듯이 분명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리라 믿는다.

 

참 고 도 서 목 록

김수진. 사진과 함께 읽는 이야기 한국 교회사. 서울: 쿰란출판사, 2008.

김인수. 간추린 한국교회의 역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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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살림, 2003.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 서울: 전망사, 1986.

이덕주. 한국 교회이야기. 신앙과 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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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일. 간추린 기독교 선교역사.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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