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웃 눅 10:30-37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혼자가 아닌 누군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만남의 인관 관계 속에서 살고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다 만남이 잘된 사람들입니다. 부모, 부부, 스승, 목사와 교인,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을 거의가 사람을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나서는 안될 사람을 만나서 그러합니다. 나쁜 친구 만나 잘못된 삶을 살고, 악덕업주 만나 고생하고, 강도 만나 불행해집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좋은 이웃인가를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한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몹시 매를 맞고 거반 죽어 가는 상태에서 다행이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에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자기가 타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주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고 치료를 부탁하고,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주리라고 하고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좋은 이웃인가 ?

 

1. 강도를 만났습니다. (30절)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1) 강도는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강제로 빼앗는 자입니다. 자기의 욕구를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 강도를 만난 사람은 그가 가진 물건을 다 빼앗고 옷까지 벗겼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뒤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죽도록 때렸습니다. 우리나라 강도는 돈만 뺏는 것 아니라 강간하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얼굴을 알았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다하여 죽여 암매장합니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 성도에게 강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도적질하고 강탈해 가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온갖 마귀의 마음을 심어놓아 멸망의 길로 이끌며, 사람들에게서 평강과 축복과 사랑을 빼앗아 가고, 불안과 반목과 싸움과 분쟁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싸움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온갖 좋은 것들과 생명과 축복들을 송두리째 빼앗고 저주와 죽음으로 끌고 가는 자입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우리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강도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선을 행하는 자됩시다. 좋은 이웃이 됩시다.

[벧전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3)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 받고 사는 곳인데 거기를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성경에 내려가다가 불행하게 된 사건들이 있는데 룻기 1장에 나오미는 베들레에 흉년이 들어 모압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곳에서 사랑하는 남편, 두 아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 과부만 남아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강도 만난 것입니다. 그는 다시 자부 룻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외치라 할 때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인 다시스로 내려가려고 배를 탔고, 배 밑으로 내려가 깊이 잠이 들었고(욘1:5), 풍랑을 만나 물 속으로 내려가고, 고기 뱃속까지 내려갔습니다. 내려간 길은 요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 전체에게 풍랑을 준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이 내려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심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

 

4) 강도를 만나기 쉬운 길이 있습니다.

① 밤길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마음이 범죄하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점점 어두운 일을 행하다가 어두운 영에 붙잡히게되어 영혼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합니다.

(엡5:11-12)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

[요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② 혼자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강도 만나지 않습니다. 양이 목자의 보호에서 떠나게되면 노리던 이리나 늑대가 와서 해하는 것입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③ 좁은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신앙의 정도를 걸어야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단들 가만히 찾아와 유혹하여 골목길로 끌고 가 영혼이 죽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뒷골목로 다니지 말고 큰길 바른길로 다녀야합니다.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④ 몸에 비싼 귀중품을 가지고 다니면 강도를 만나기 쉽습니다. 세상의 썩어질 세상 보화도 강도가 따르며 빼앗으려하는데, 더구나 하늘의 영적 보화를 간직한 성도는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 또 하늘의 값진 보화를 지닌 성도는 아무데나 가는 것 아닙니다.

[시1: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2.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31절) 제사장은 율법을 집행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입니다.

1) 제사장이란 성별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제사장은 항상 마음뿐 아니라 몸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나가 거룩한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몸을 더럽혀질 수 없는 이 제사장이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어 가는 자를 돕다가 피를 묻히면 부정하게되며 만일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되어 부정한자가 되는 것입니다..

(레22:4-7)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자나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자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 후에 성물을 먹을 것이라 이는 자기의 응식이 됨이니라 "

제사장은 내가 할 중요한 일인 제사 드리는 일을 위하여 부정한 다른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를 돕는 일이 하나님께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보다도 먼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을 그 제사장은 몰랐습니다. 그 때문에 소와 양을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만을 생각하면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합니다.

(마12:1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2) 제사장은 율법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법이란 죄를 벌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법이란 정죄하고 규제합니다. 법은 만들수록 사람을 구속합니다.

(롬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법이란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요 심판이요 차가운 것입니다. 법법 찾는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요8:3-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

 

3)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31절) 제사장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가 왜 피하여 지나갔겠습니까?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강도 만나자 처럼 내려가는 마찬가지 신앙에서는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신앙 산 믿음이 되어야 남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3.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아하는 자입니다. (32절)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1) 레위인들은 의식을 집행하는 자들입니다. 의식이란 외모적인 것으로 형식을 말합니다. 성전에 관계된 모든 일을 맡아하는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성전 봉사만을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은 레위인의 일만을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하나의 잘 짜여진 의식에 맞추어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뜨거움이나 감사한 마음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 외식하는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적인 것보다는 외형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허세적인 생활 형식적인 삶을 말합니다. 교회도 사람도 겉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잘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말과 행동이 다른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우월을 과시하며 자기자랑을 일삼고 남은 무시하는 자입니다.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마 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3) 남은 가르치고 자기는 가르치지 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알기는 알되 행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롬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4. 사마리아인을 만났습니다. (33-35절)

1)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33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갔다고 하였습니다. 불쌍이 여길 때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친구가 됩니다. 저를 도우려면 위험이나 자기의 손해를 계산하는 이기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죽어 가는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주었습니다.(34절)

우리들은 세상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일을 해야합니다. 어떤 성도는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는 사람이 아니라 꼭 아픈 자리만 골라 건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해도 그 사람의 약점이나 부끄러운 일들을 들추는 사람입니다. 상처된 자리는 조금만 건드려도 고통을 당합니다. 좋은 이웃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어 주는 자입니다.

[살전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3) 돈까지 지불하였습니다. (35절)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물질까지 아낌없이 기꺼이 베풀고 투자할 수 있는 자가 참 좋은 이웃입니다. 좋은 이웃은 물질을 투자하므로 되는 것입니다. 옛 어른들의 말이 “이웃과 황소 한 마리 가지고 다투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으나 같은 동족인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으나 개 취급하며 상종도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은 구원해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마음과 몸과 물질까지도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희생했습니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4) 자신의 짐승에 태웠습니다. (34절) 그 자신의 편안함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중상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좀 힘들게 하면은, 누군가는 좀 편안해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내가 수고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쉬게되는 것입니다.

[눅 11:46]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5) 주막에서 보호함을 받게 했습니다. (35절)

이 사마리아인은 주막까지 태우고 가서 그곳에서 그가 다시 올 때까지 보호하도록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결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고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좋은 이웃 사마아인을 만날 때 생명을 얻었습니다.

제사장을 만나야 소용없습니다. 레위인을 만나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만남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인생에는 많은 사람과의 만남의 삶이요 또한 영혼의 구원자인 예수를 만남으로 영생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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