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사야 64:5 – 8)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새싹이 돋고 대지를 덮는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 탄성을 질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떨어진 낙엽들을 열심히 쓸어 담고 있는 낯선 청소부와 마주하게 됩니다.


한없이 쓸려가는 낙엽을 보고 있노라면 그 푸르름과 신선함이 도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의문입니다. 거센 비바람도 견뎌내고, 그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그 기세가 다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풍성한 생명력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밟으면 부서지는 한줌의 재로 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이미 오랫동안 신앙생활에 젖어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절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냥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무덤덤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전적인 타락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전혀 그 사실을 알지도, 받아 들이지도 않습니다. 간혹 지하철이나 트램을 타고 가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찌나 냄새가 고약한지 눈으로 발견하기도 전에 저절로 그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나중에서야 그 냄새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려 봅니다. 분명 생명은 붙었지만 너무도 불쌍한 인생입니다. 스스로는 그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해서 아무도 그 사람의 옆으로 다가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고독한 인생입니까? 누군가 이미 충고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세나 한탄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만을 원망합니다.


우리는 그 누더기와 같은 더러운 옷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에 만족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핑계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옷을 입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니 가기도 전에 청소부 천사에게 치워지고 말 것입니다. 설사 내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향기로운 향수를 뿌렸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 주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우리의 부정한 모든 것을 감출 옷은 없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꿩은 도망가다 급하게 되면 머리를 땅이나 수풀에 쳐 박는다고 합니다. 이 말만 듣고 어릴 적에 얼마나 꿩을 쫓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걸음이 장난 아닙니다. 아무튼 꿩은 그렇게 머리를 땅에 박고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를 땅에 쳐 박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어리석고 웃긴 행동입니까? 

우리는 누더기와 같은 옷들을, 생명력을 잃은 죽은 낙엽을, 죄의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인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옷으로 거듭난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에게 주님의 옷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의 생명력이 넘치던 잎사귀에서 메말라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놓는 소멸의 길로 걷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본문 7절을 보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습니다. 애써 주님을 붙잡으려는 인생이 없습니다. 주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힘껏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우리가 죄의 이름을 부르고 죄를 붙잡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인생 가운데 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고 주님을 붙잡지 않는 인생이 되었을 때 우리의 무성한 잎사귀는 떨어지고 매서운 바람에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놓고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혹시 오해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 얼굴을 들어 내놔야 하는 것 아닌가 치사하게 숨바꼭질 하듯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얼굴을 감추셨네…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어떤 분이십니까? 민수기 6장 24 – 26절에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셔야 할 때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습니까? 오래 전에 잃어 버렸던 한 아들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찾고 보니이미 입양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때 말없이 돌아서야 하는 부모의 심정…


어쩌면 하나님은 그 부모의 심정보다 더 가슴이 찢어 지십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가정에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오래 전이라 주님의 이름 조차도 잊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현실에 삶에 만족하며 거짓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로 얼룩진 그 아들에게서 하나님은 얼굴을 숨기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를 아직도 사랑셔서 그 얼굴을 감추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물든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지 않았다고 해서 이 생활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거짓 아비에게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 아비에게 충성을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서로의 욕망에 의해 맺어진 어그러진 관계입니다. 더 이상 그 관계를 애써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나의 아버지를 찾을 때입니다. 


거짓 아비 밑에서 이미 할 만큼 다 해봤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진흙과 같은 인생...

연약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생...

그 인생 할 수 만 있다면 진정 나의 아버지를 위해 뭔가 좀 하다 가야겠다.

이제는 주님이 빚으셔서 주의 일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 만큼 다 해봤습니다. 짧은 인생 이 만큼 했으면 하나님을 떠나 살아 볼 만큼 살아 봤습니다. 이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때가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그 속에 머물려고 하십니까? 도대체 언제 돌아서려고 하십니까? 눈이 뽑히고? 삼손처럼 눈이 뽑히고 그제서야 돌아 서시렵니까? 지금 당장 돌아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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