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선상의 윤리 - 최봉기

책 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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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담론구성 요소와 수레바퀴 모델

필자는 이 책의 접근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구조를 낳았고 인간은 그 구조 내에서, 그리고 그 구조를 변형하면서 존재의 특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또 그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왔다. 해석은 결국 그러한 구조를 밝히고 구조를 변형하고 또 구조를 낳는 순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윤리학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의 행위의 개념화를 다루고 개념의 분석과 해석 속에서 또 다른 행위를 추구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와 같은 방법론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차원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상호 관련짓는 방식에 의해서 인간의 삶을 다루어 보고자 한 것이다.’ 필자는 독자적인 담론형식을 통하여 학문에 접근하고 삶을 이해하고 변화를 위해 결단하고 동시에 신앙실천과 영적 발전에서 그 출입구와 통로를 발견하고 걸어가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한계선상에 놓인 교회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한계선상에 놓인 교회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패러다임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래상황과 도덕적 헤이로의 에토스 그리고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주류 앞에 놓인 믿음의 이야기들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2

성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의 근거

인간의 행위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묻고 대답하는 모든 일들을 이 책을 통해서 다 할 수 없는 일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론적으로 지니고 있는 윤리적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에 관한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해 보면

1.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2. 내용이 공동체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의 특징

1. 하나님 중심의 기원 - 모든 이야기의 기원, 모든 행위의 기원,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우주 만물의 기원에서 하나님이 우선권을 갖고 그가 시작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인간이 윤리적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의미한다.

2. 역사적 과정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따라서 선택하여야 하며 바로 그러한 선택만이 도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신약성서 윤리의 세 요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 나라, 교회 -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의 비밀을 알고 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론은 언제든지 현재적인 것이고 따라서 언제든지 급진적인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기다려지는 완성적 사건이며 오늘을 살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된다.

성서윤리의 모델

1. 가족모델(아브라함) :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가족 상호간에는 평화가 유지 되어야 한다.

2. 제사장의 모델 :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 받은 제사장의 직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해는 것이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울 때 거룩 즉 성결 법전을 두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절차를 확립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거룩의 요청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윤리적인 규범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만 한다. 거룩한 삶의 길을 통하여 언약의 백성이 되고 약속을 성취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3. 왕의 모델 : 가족적 모델보다 상위가 될 수 없다. 왕의 존재는 가족의 생존권보다 우선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어떠한 왕의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묵과될 수가 없었다.

4. 지혜의 모델 :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지혜의 근원도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인간이 지혜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할 때이며 그러한 행동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때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성경으로부터 배워서 그리스도인의 행위결단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 속에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예언자적 모델 : 다른 모델이 바르게 이행되지 않거나 왜곡될 때에 이를 바르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가 일반 백성이든 왕 혹은 제사장이든 간에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고쳐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사이에서 바르게 살아야만 한다. 성서윤리의 골격은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세워진 것이다.

6. 예수 모델 :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신 이 사람을 봄으로 우리가 어떻게 타락된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 것인지도 알게 된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형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인간되심과 그분의 삶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의 과제를 알고 또한 어떠한 성품을 지니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한 복판에 오셔서 계심으로 비로소 우리는 참사람이 무엇이지를 바라보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성의 토대로 갖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를 비우는 겸손, 온유, 인내, 관용, 사랑, 정의, 용기 등 이 모든 삶의 내용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성품이 어떠해야 할지를 배우고 그 형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받음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해 불사한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회개가 서로 상관성을 각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행위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고 계신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어야 한다.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한편 새로운 절망을 열어주심으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킨 데서 찾아진다. 악에 대한 적극적 도전은 윤리적인 삶을 위하여 중요한 기준을 설정해 준다. 평화와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신 분이시다.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보다 빨리 발견하고 정확하게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폭력적인 저항의 방법으로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사역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윤리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십자가와 같은 윤리적 결단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죽으신 후에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 안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근원이자 힘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삶이란 그와 같은 생명을 개인과 공동체 내에서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성령 모델 : 성령의 역할은 하나님의 행동에 관여하고 계시면서 성도들의 행위를 지도하고 온전하게 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힘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8. 제자와 교회 모델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신으로서 혹은 전위대로서 존재하며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세상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여야 할 것이다.

성서윤리의 두 축: 십계명과 산상수훈

1. 십계명 : 포드 - 현대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각 계명이 지니고 있는 뜻을 현대의 상황에 적용시켜 재해석하였다. 예를 들면 자연신, 건강의 신, 스포츠의 신, 고학의 신, 학문의 신, 쾌락의 신, 인기의 신, 재물의 신 등이다.

켄트 휴스 -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 해설에서 십계명이야말로 오늘날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역설한다.

에메트 폭스 - “존재의 법칙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본다.

2. 산상수훈 : 십계명과 더불어 성서윤리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을 레온 라가츠는 산상수훈에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며, 평화주의자 프란츠 알트는 산상수훈의 윤리적 해석에서 심정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하는 입장을 거부한다.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산상수훈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면서 그 내용을 모든 공적 사회생활 영역으로 확대할 것을 주장한 알트의 견해와, 산상수훈의 내용은 단지 개개인의 사생활에만 적용 가능할 뿐이라고 제한시킨 막스 베버의 견해를 둘 다 부인하면서 제 3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산상설교는 정치적으로 확대된 전체사회를 위한 것도, 단지 개인만을 위한 것도 아닌 하나의 대안적 사회인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라고 말한다. 교회 혹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데는 요아킴 예레미야스나 로이드 존스의 경우에도 동의 한다. 조르단의 경우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원 등의 잘못된 처세술에 대해서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고 그와 같이 자신을 고치고 돌아선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삶을 제시한 내용이라고 말한다.

3

생명: 인간행동의 담보

기독교 윤리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증진시키는 작업과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고 그 생명을 풍부하게 구현하는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회복과 그들의 삶을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최근에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생명유전자공학도 활발해지고 있으며 세계 도처에서 생명복제, 유전자 변형, 실험관 아기 탄생 등 심심치 않게 생명의 신비에 접근하는 인류의 기술이 뉴스화 되고 있다. 이젠 기술에 대한 격려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윤리적 영적 통제가 있어야 할 때라고 본다. 기술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과 신비는 지켜지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과 레저: 인간의 생활 조건

소중한 생명을 지닌 인간의 생활조건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하는데 여러 가지 가능한 주제 가운데 노동과 레저 문제를 통하여 이를 함축하고자 했다. 특히 오늘날 레저에 관한 문제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우선적으로 추구되는 것이기에 문제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노동과 레저는 불가분적으로 밀접한 관련성을 상호간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괴로써의 인간의 죄는 노동과 안식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의 섭리를 깨닫고 그 속에서 인간이 참 인간이 되는 조건을 회복시켜야만 한다. 노동과 레저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과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레저의 삶의 당위성을 선택하는 자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윤리적인 삶이기도 하다. 인간의 당위적인 삶은 바른 관계 위에 기초하는 것이다. 윤리적인 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가꾸는 행위를 말한다. 그럼으로 노동은 동시에 참 레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단순성: 대안적인 삶의 스타일

대안적 삶의 모색에서 복고적인 열풍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단순성으로서의 대안적 삶의 스타일은 어쩌면 골리앗 앞에 다윗의 출정과도 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보다 신중한 이해와 실천을 요청하는 것이다. 신자의 물질적인 삶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삶이 물질과 관련된 육체적인 삶과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인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원형과 변형: 한국 기독교의 윤리적 과제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 본래의 본질적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일종의 문화적 기독교, 즉 현대 한국문화의 포로화된 상태에서 변질되어 버렸다고도 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한국 기독교가 문화 배타적이어서 도무지 문화 변형적이지 못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문화화된 무교와 어떤 관계방식을 갖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신뢰성이 부족한 교리적 싸움이 가열됨으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특성 즉 사랑과 용서, 화해 등에 의한 문화적 변형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비윤리적인 분열만을 거듭함으로 기독교 신앙의 통전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그 결과 문화적 특성을 지닌 무교와의 관계 속에서 대처할 만한 결집력을 상실한 채 스스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에는 한국화된 유교적 문화의 원형과 풍토적 가족주의 원형이 조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냉사회성, 군사통치 하에서 형성된 물신숭배, 물량주의, 과소비성 등의 영향력과 정의롭지 못한 비굴성도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한국 기독교가 크게 윤리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는 문제라고 하겠다. 대책은 분명히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대안은 원형과 변형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문화적, 윤리적인 문제라고 여겨지지만 그 내부에서는 실로 영적인 대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한다. 핵심은 영적인 것인데 다만 싸움의 현장이 교리에서 문화와 윤리로 옮겨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스도인의 문화 윤리적 관심이 소위 행위를 성급히 앞서는 가운데 존재나 정체성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교리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윤리적, 문화적 관심이 고조될수록 세상에 대하여 영적인 차원을 열어가야 하며, 엘룰이 이미 지적한대로 세상의 진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되 결국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하고 선포하려는 노력 속에서 영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그 치명적인 경향성의 깊이를 헤아리고 그 영적 실체를 분별하여야 될 줄로 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관심은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믿음의 실천, 즉 행위적 관심을 뒷받침하여야 하는데 여기서 존재론적 관심이란 세상이 잘못가지고 있는 환상을 폭로하고 깨뜨리며 그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영적 실재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고 동시에 모인 것이 하나님 앞에 열려져 있는 삶, 즉 영적인 삶을 살게 해야만 할 것이다.

영성: 그리스도인의 회개경험과 훈련

모든 기독교 교리와 윤리 즉 신앙의 실천 이면에는 영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영성에 관한 문제는 종국적으로 이론이 아닌 영적 경험과 성숙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숙에서만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인 분야에 있어서 영성과 도덕성의 관계는 회개경험의 역동성에 관한 연구에서 접근된다. 회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힘에 의한 영적 실재의 경험이며 이로써 느끼게 되는 역동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인격 안에서 경험된다. 회개경험의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완성하는데 있을 뿐이다.

영성신학은 신앙과 행위의 만남인 동시에 영성과 도덕성의 혼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근원적이요 핵심인 동시에 도덕성의 근원이기도 하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내적인 기도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예배, 그리고 변화를 받음으로써 나타나는 해위결단 등은 상호 깊은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 감 문

가장 도덕성이 바닥에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연일 뉴스를 통해서 문란한 생활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런 윤리적으로 어긋난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적대감이나 혹은 불쾌감을 표현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가식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현대인들의 내면에는 이미 탈윤리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라는 가상공간은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를 가져오고 있다. 익명성에 대한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어떤 억압으로 보이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현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익명성의 보장은 자신으로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 남을 헤하거나 남을 비방하기 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익명성을 이용하여 최대한 남을 내리고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탈윤리를 말하면서도 자신은 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높은 윤리를 요구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자신의 대리 만족을 누리기 위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이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도 우리가 배웠듯이 성경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모델을 완벽하게 다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면 성경에서 제시하는 모델을 그대로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바로 필자가 말하듯이 패러다임의 부재 때문이다. 이 사회는 이미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 갈 수 없는 상황으로 왔다고 본다. 이미 스승과 제자 그리고 부모님과 자녀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것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그 모델은 바로 성경에서 제시해야 한다. 그 다림줄을 통해서 무너진 축대를 다시 세우고 기울어진 벽돌을 올바르게 쌓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지금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같이 요동하고 흔들리며 어떤 것들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적인 정신세계를 그대로 가져와 오히려 다림줄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영적 각성을 통해서 개신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서 처음 의도하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사회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 놓여있다. 어디에 자신의 기준을 맞추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런 혼란속에서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윤리의 원리들이다. 그 윤리의 원리는 바로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즐거움과 오락과 명예나 권력이나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의 삶의 교훈이나 원리나 명상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권리를 챙기기 위한 윤리관의 형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입은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윤리관을 형성해 가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다수의 횡포와 진리의 묵인을 떨쳐 버리고 이 책에서 밝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한 그리고 교회의 행함으로 삶의 구체적인 실천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교회의 윤리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누가 세상을 이끌고 가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를 알려 주고 있어서 현 한국에 있는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고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 무교와 유교에 얽힌 잘못된 신앙관과 그래서 잘못 형성할 수밖에 없는 윤리관을 다시 바라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었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어서 좋았다. 단 중간 중간에 많은 오타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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