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문화권 복음전달의 원리와 적용 - 존 시먼즈


타문화권 복음 전달의 원리와 적용
국내도서
저자 : 존 시먼즈 / 홍성철역
출판 : 세복 199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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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 대두되고 있는 슬픈 현상은 기독교인의 정체이다. 더 이상의 회심자가 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종교로 이탈하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분명 거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기독교 자체 내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전달하는 자들의 잘못된 해석과 방법들이 흐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급진적인 발전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분명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원리와 방법들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타문화권 복음전달의 원리와 적용이라는 책을 통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원리와 정서들을 깨고 보다 효과적인 방법들을 배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복음전도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여러 방법이 있으며 그 방법들 중에 잘못된 두 모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겠다. 먼저 정면 접근법이다. 이 방법은 많은 동양권의 국가에서, 특히 강한 반서구적 태도를 취하는 지역에서 강한 국민적 정서를 갖는 오늘날에는 매우 어리석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타종교들 신앙과 신들에 대한 정면 공격으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을 북돋아 줄 뿐이다. 또다른 악수 접근법(타협의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청중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입에 맞고 쉽게 만들기 위하여 복음을 희석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믿음에 대한 비참한 배신이므로 배격해야만 한다. 우리는 기독교 메시지의 형태를 바꿀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변화시킬 권리는 없다. 우리는 위의 방법들을 배제하고 다음에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마음 대 마음의 접근법이다. 이 방법은 우리 모두의 전도와 설교에 기초가 되어야 할 일반적 접근법이다. 영적인 혼합된 공허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혼합된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청중들에게 특히 효과적이다. 두 번째로는 접촉점 접근법이다. 이 방법은 청중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야 하는데, 일반적 관심들 가운데서 혹은 공통적 필요와 문제들 가운데서 그리고 공통된 종교 사상에서 같은점을 발견해서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으로, 동의의 영역에서 반대의 영역으로 진행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것은 매우 재치있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세 번째의 방법은 대조 접근법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들 간의 유사점보다는 대조점들을 발견하려는 것이므로 접촉점 접근법과는 상반된다. 이 방법은 논리적인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비길 데 없는 유일한 계시라면, 분명 복음과 다른 종교들 사이에는 많은 대조점들이 발견되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접근법으로 현지인에게 접근했다면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해야한다. 그것은 먼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지의 종교를 연구해야 한다. 현지인의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으로서 깊은 관심을 보일 때 비로소 그들도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지인의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 이것은 타문화권 복음 전달에 최우선 과제이다. 언어를 통달은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에 효과적이냐 비효과적이냐의 상대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언어을 습득했다면 현지인과 일체감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효과적인 복음 전달자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그들의 사상을 인식하고, 그들의 견해들을 이해하고, 자기 표현에 대한 그들의 갈등을 순수하게 동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체감은 한번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경험과 그 경험을 나누는 일에 실제로 참여함으로 얻어진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이 집을 방문하고, 우정을 맺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마음과 정신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서 일체감을 성취할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청취자가 되는 것이다. 복음은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복음 전달자는 설교 전에 잘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설교 후에도 청중들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경청해야 한다. 효과적인 복음 전달은 전하는 자에서 받아들이는 자에게로 일방통행이어서는 안된다. 듣는 자에서 말하는 자에게로, 소위 "사회적 피드백"(feedback)이 있어야 한다.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해 그들에게 관심과 언어습득을 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었다면 이젠 복음 전달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복음 전달의 첫 번째 원리는 복음 제시에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심오한 신학적 설명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리는 설교의 긍정이다. 그리스도는 부정적인 것들과 금지 사항만으로 다른 종교와 경쟁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과 인간과 삶에 대한 확신의 풍요와 능력과 영광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이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복음 선포에서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하고, 복음의 시범에서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 또한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하기 위해선 메시지를 관련성있게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거기에 성령님의 임재를 믿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럴때에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의 전달의 기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 전달함에서 여러 장애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장애로는 언어의 장애가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구두나 비구두의 전달에서의 어려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문화의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분명 그곳은 자신이 살았던 곳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다면 커다란 실망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종교 개념의 장애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비기독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데 생기는 모든 장애 중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들다. 종교적 용어의 개념의 차이로 메시지의 전달해석에서 심각한 괴리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현명한 방법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우리는 토착적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신경을 기울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복음 전달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선교사 자신의 무감각과 무분별 때문이다. 흔히 복음 전달의 장애는 전달자의 서양식 사고 방식에 의해 생겨나지, 듣는자의 문화적 양식이나 종교적 개념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는 청중의 배경과 삶의 양식에 맞는 토착적 양식으로 하는 설교을 개발해야 한다. 설교 주제나 예화를 그 사람의 실정에 맞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럴 때 만이 그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며, 선교사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니 복음전달에 있어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복음 전달의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적용되는 원리들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지는데, 즉 국내에서 비기독교인의 전도함에 있어서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 원리들을 피부로 느끼며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내용이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현상을 이미지화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이 일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 처럼 나해하고 어렵다. 복음을 전해듣는 사람의 머리속은 커다란 혼란이 야기되며 더욱 알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올바른 이미지를 전달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급속도로 발달된 물질만능 세계에서도 원본의 사진을 아무런 손상이 없이 그대로 읽어 들여 저장한다든지 출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본의 이미지를 복사하고 복사하고 계속해서 복사하면 원본의 이미지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전혀 다른 그림이 뛰쳐 나올지 모른다. 복음도 그 위미에 손상이 없이 그대로 전달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한다거나 무시해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의도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에게 처음의 의도를 그대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기교와 때로는 기존의 방법에 벽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의 부모님이라 믿어왔던 사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당혹스러움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당혹스런 상황에 맞닿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전달의 어려움인 동시에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책에서 제시한 많은 이론들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고 들어왔다. 그말은 어느 유행가의 가사에도 나오는데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이다. 이 말은 말하기 너무도 쉽고 또 쉽게 행동으로 옮길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말처럼 완벽하게 남의 입장으로 뛰어 들어가 그 사람을 이해할수 없다. 지금까지 자라온 환경, 어릴적 추억과 아픔, 추구하는 삶과 행복의 조건, 받아온 교육의 차이, 주위의 상황들 그 어느 하나 완벽하게 다가 설수 없는 것들이다. 복음을 전달하는 경우 분명 우리는 현지인의 상황에 맞도록 상황화를 해야하며 토착화를 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오랜 시간을 그리고 현지인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자칫하면 잘못된 적용과 상황화로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오랜 관심과 인내와 끈기를 요하는 타문화권의 복음 전달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국에 대한 어떤 향수에 젖어,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태도로 그들에게 다가 선다면 스스로가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고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현지인까지 몰고 들어가 동반 자살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나 의무감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복음 전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복음 전달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그들이 복음 전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삶의 전환은 누구누구에게만 있도록 정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따라 복음의 열정을 갖고, 어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복음을 전달할 것이다.

그 갑작스런 하나님의 선택을 위해 우린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복음 전달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책을 통해 다른 세계를 접하고 경험을 쌓아 갈수 있듯이 다양한 원리와 방법들이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실수의 범위를 줄여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한쪽으로 지나친 치우침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결과를 안고 온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평행을 유지하며 나가야 할 것이다. 많은 이론을 접했다면 이젠 실제적인 경험을 해야 할 것이며, 실제적인 경험이 있다면 이론을 겸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치 않다면 우리는 아무런 쓸모 없는 죽은 지식과 생동감없는 실천을 무의식중에 행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날 문득 내게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그 누군가를 만나다면, 순간 나는 매우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자의 방법이 틀려서도 아니고, 거침없는 그의 질문과 끊임없는 대답에서 오는 아련한 현기증이 아니다. 바로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그에 눈에 전혀 비쳐지지 안했다는 사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원리와 방법을 동원해서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진심으로 회심하고 실신한 신자가 된다고 한들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모습이 없다면 모든 원리와 벙법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이중 인격자 일뿐이요,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한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 뿐이며, 자신의 갈급함을 뒤로한체 남에게 물을 건내주는 가엾은 위선자일뿐이다.

위의 내용에서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해볼 가치도 없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뱀의 허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력을 상실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껍데기에 불과하다. 언 듯 보고 뱀으로 착각하고 섬듯 놀라겠지만 오래되지않아 뱀의 허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며, 길옆에 있는 작은 작대기로 흩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참으로 비참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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