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어 중독되는 ‘필사’의 맛
2013. 5. 14. 16:10
손으로 읽어 중독되는 ‘필사’의 맛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소설가 신경숙부터 기자지망생·가톨릭신자까지…‘베껴쓰기’에서 배우는 사람들
마른 향내 나는 연필로 글을 써본 적이 언제였던가. ‘사각사각’ 부드럽게 써지는 연필 대신 컴퓨터 자판이 글을 쓰는 손도구가 되고,퀴퀴한 냄새 나는 종이 대신 매끈한 전자기기가 책을 대신한다.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에 연필로 밑줄 긋는 즐거움은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
하물며 손글씨 쓰는 즐거움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왔다고 글쓰기의 힘이 약해지진 않았다. 메일, 블로그, 미니홈피에 이어 140자로 글을 쓰는 트위터 등에서 일상적인 글쓰기가 이뤄지면서
글을 잘 쓰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이 역으로 늘었다. 종이와 연필이 아닌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됐을 뿐 좋은 글을 읽고 쓰고 싶은 열망은 더 커졌다.
소규모 출판이나 1인 미디어에 빠진 사람들이 늘고 있는 흐름이 이를 증명한다. 바야흐로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글씨 최명희 작가
·글씨 최명희 작가 글쓰기의 시작은 책을 잘 읽는 것부터 시작한다. 소리 내 읽고 듣는 낭독이 최근 책 읽기의 흐름이라면 글쓰기의 영역에서 오랜 시간 주목해온 독서법은 책을 베껴 적는 '필사'(筆寫)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을 베껴 적다 보면 눈으로 읽을 때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경전, 소설, 기사, 영화 등 필사의 대상도 여러가지다. 필사로 책을 읽는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의 문장, 작품, 생각을 닮고 싶어 필사에 집중한다. 중독되면 필사(必死)적인 필사로 이어진다. 손글씨가 사라지는 시대, 눈이 아닌 손으로 읽는 필사의 맛은 무엇일까.
'혼불' 필사 이벤트에 658명 참여
전북 전주에 있는 최명희문학관은 작가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지난 2월부터 < 혼불 > 10권을 일반인들이 한 장씩 옮겨 적는 이벤트를 열었다. 문학관 방문객과 인터넷 신청자들이 필사에 참여했다. 애초 11월까지 열 계획이었던 필사 이벤트는 호응이 뜨거워 10월 중순에 종료됐다. 필사 참가자는 모두 658명.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한 글이 '온몸에 눈물이 차오른다'에서 끝이 난 < 혼불 > 은 원고지 분량으로는 대략 1만2000여장에 이르지만 미숙한 원고지 사용자들이 있어 본래 분량보다 많은 원고지 1만2500여장이 쓰였다.
산업디자이너 조성휘(36)씨도 < 혼불 > 필사에 참여했다. 전권을 다 읽지 못했지만 평소 < 혼불 > 의 글을 좋아했던 그는 필사 이벤트에 회사 동료 7명과 아내까지 참가시켰다. 5권 '자시의 하늘' 중 일부를 아내와 이어달리기하듯 써내려간 필사는 2월부터 4월까지 꼬박 두 달여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임신중이던 아내가 필사를 하며 태교를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처음엔 왜 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던 아내도 필사를 마칠 즈음엔 잘한 것 같다며 좋아하더군요."
아내와 함께 태교 삼아 처음 해본 필사는 그에게도 만족감을 줬다. 인터넷만 사용하다 오랜만에 편지 쓰듯 손글씨를 써보니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숙제하는 기분이었지만 쓰기 싫거나 힘들지 않았다. "필사가 아날로그의 맛"이라는 조씨는 이제 태어난 지 50일이 된 아이가 크면 적극적으로 필사를 권할 참이다. "아이가 글을 배우고 쓸 때쯤이면 세상은 더 디지털화가 됐을 텐데 아날로그의 따뜻한 정서를 아이도 느끼게 하고 싶어요."
흔히 문장을 잘 쓰려면 문장력이 좋은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며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지망생들치고 필사 경험이 없는 이들을 찾기 어렵다. 신경숙, 안도현, 최명희 등 유명한 문인들도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필사를 하며 소설가로서의 삶에 눈을 떴다는 신경숙은 산문집 < 아름다운 그늘 > 에서 필사의 경험을 풀어놓았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 볼 때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지난해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면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 황지운(27)씨도 신경숙 작가를 보며 호기심에 필사를 시작했다. 오랜 습관이 버릇이 된 듯, 소설가가 된 지금도 좋은 글을 만나면 어김없이 노트에 옮겨 적는다. "평소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대신 꼼꼼하게 보진 못하더라고요. 필사를 하면서야 책을 세세하게 읽게 됐어요." 무엇을 필사하느냐에 따라 배우고 느끼는 것도 달랐다. 소설에선 묘사하는 방법이나 문단 구성법 등을, 시에선 시의 분위기나 시인의 감각을 배웠다. 필사를 통해 받는 느낌이 좋아 소설 한 편을 쓰기 전 시 한 편을 필사해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오답노트를 만들어 공부하면 자신이 틀린 부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잖아요. 필사를 해보니 내가 쓴 글의 문제점이 뭔지 알게 되더라고요. 그 맛에 필사를 계속하는 것 같아요."
글쓰기 강사 백승권(44)씨도 문학지망생이던 고등학생 때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 정지용 시집 > < 백록담 > < 금강경 > 등을 필사하며 작가와 동일시되는 체험을 했다. "한지를 잘라 책을 만들고 펜에 잉크를 묻혀가며 정지용 시인의 시를 한 편씩 적었어요. '유리창' '카페 프란스' '해협' 등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서정에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기억이 새롭네요." 백씨에게 필사는 단순히 베껴 쓰기가 아니다. 마치 내가 그 책의 작가가 된 양 글을 쓰는 고통과 희열을 함께 느끼는 체험이다.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 외에 필사의 단점을 찾을 수 없다는 백씨는 필사에서 종교적 경건함마저 발견한다. "불교에선 경을 베껴 쓰는 것을 '사경'이라고 해요. 사경은 붓다가 말한 진리를 눈과 머리로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비롯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죠. 처음 필사하는 분들도 꾸준히 해보면 그 경지에 닿을 수 있어요."
불교의 사경처럼 종교에서 필사는 신앙심을 고취하는 방법으로 쓰인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기도하듯 경전을 필사하며 믿음을 쌓는다. 천주교 신자인 주부 강옥수(63)씨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성경을 순서대로 모두 써봤다. 성경 필사를 시작한 건 약 3년 전. 공무원 퇴직 뒤 소일 삼아 썼다. 필사는 처음이었지만 주변에 성경 필사를 하는 가톨릭 교인들이 많아 시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성경을 읽으면 머리에 안 들어오고 스쳐지나가니까 한줄 한줄 머릿속에 들어오게 하려고 필사를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잡념도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져서 성경에 적힌 이야기에 더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에겐 '영상 필사' 추천
필사는 시나 소설, 시나리오 등 주로 글쓰기 분야의 입문기에서 거친다. 백석의 시를 많이 필사했다는 안도현 시인은 필사를 "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어 보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문장을 베껴 써 보는 것은 작가의 숨결을 따라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 같은 것으로 글도 고추장을 찍어 먹듯 손맛을 봐야 맛을 안다는 의미다. 평소 시를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학기마다 약 100~200여편의 시 필사를 과제로 낼 만큼 그에게 필사는 무결점 공부법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심산도 자신이 가르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에게 필사를 과제로 낸다. 글이 아닌 영상 필사다. "영화를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이 영상 필사"라고 말하는 그는 "영화를 베껴 적는 건 구조를 파악하고 미장센을 배우고 편집을 배우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영상 필사는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필사하는 것과 다르다. 영상을 자주 정지하면서 보고, 시퀀스를 나눠서 보고, 보지 않고 대사를 외워서 쓰고, 본 뒤에 필사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영화 한 편을 완벽하게 필사하려면 10번 이상을 보니 이만큼 빠른 영화에 대한 이해와 암기가 없다. "작가, 감독 할 것 없이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하는 영화 공부법"이라는 게 심산 작가의 설명이다.
기자를 꿈꾸는 언론고시생들도 필사로 문장 공부를 한다. "필사는 글을 몸에 새기는 문신 같다"는 언론고시생 김정지훈(27)씨는 신문 칼럼을 필사해봤다. 사설은 논리적인 문장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다. 사설을 필사하다 보면 논리적인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길고 짧은 문장이나 조사의 쓰임 등을 세밀하게 볼 수 있어 글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그는 언론인 지망생답게 신문 칼럼 필사본도 만들어 볼 계획이다.
첫 목표는 평소 글 스타일이나 사회를 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어 좋아했다는 언론인 김선주씨가 쓴 < 이별에도 예의가 있다 > 다.
다른 언론고시생 최성희(25)씨도 필사를 통해 책을 읽고 글쓰기를 연습한다. "손은 머리보다 기억력이 좋다"는 게 그가 필사를 하며 공부한 결론이다. 수많은 작가들의 글을 필사하며 습작시절을 보냈다는 기자 출신 작가 명로진씨는 필사의 매력에 빠져 < 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책 > 을 펴내기도 했다. 명씨는 "누구의 글이 좋아지면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때가 있는데 이럴 때 필사를 해보면 작가의 정신세계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의 필사법은 따로 노트를 만들지 않고 책에 바로 쓰기다. "생각보다 행간이 넓어 문장 바로 아래에 따라 쓰기 좋다"는 그는 책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풀어내는 일이다. 더불어 단어와 문장을 끊임없이 매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조정래 작가는 "필사는 책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단순히 글자를 쓰는 데 끝나지 않고 통독을 하면서 옮겨 쓰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백번 읽는 것보다 한번 필사하며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나는 일필휘지(一筆揮之)란 걸 믿지 않는다. 원고지 한 칸마다 나 자신을 조금씩 덜어 넣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생전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던 최명희(1947~1998) 작가도 필사가 17년 세월을 들인 역작 < 혼불 > 을 낳는 데 도움을 줬다고 했다.
베껴 쓴다는 행위의 단순성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필사를 하며 종이에 눌러쓴 모든 글자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힘이 됐다는 이들이 이처럼 많다. 시가 죽은 세상에서도 시 한 구절 떠올리게 하는 이 가을, 잠시 컴퓨터 전원을 끄고 펜을 쥐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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