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의 생애와 영향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와 영향
I 생애
James Hudson Taylor는 1832년 영국의 반슬리에서 독실한 감리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구원의 체험을 하고 평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디박사 아래서 의학을 공부하며 자신이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믿음을 연단 하는 삶을 살게된다.
드디어 21세가 되던 1853년 9원 19일 중국 선교회(Chinese Evangelization)의 대표로 중국을 향해 떠난다. 상해에 도착한 허드슨 테일러는 10여 차례 전도여행을 한다. 1855년 10-11월에 최초로 내륙의 숭명섬에서 6주일을 지내게 된다. 윌리암 번즈(William Burns)선교사와 7개월 동안 사역한 후 폭동의 와중에 영파에 정착하게 된다. 선교회의 극심한 재정난에 부담을 느끼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다짐하며 중국 선교회를 탈퇴한다. 1858년 1월 20일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다이어(Maria J Dyer)와 결혼을 하게 되고 영파에 있는 파커(Parker)박사의 병원을 인수하여 책임지게 된다.
6년 동안의 무리한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에 귀국한 허드슨 테일러는 은둔 생활 가운데 브라이튼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내륙 선교사 24명을 위해 기도한다. 1866년 5월 26일 중국 내륙 선교사를 인솔하고 중국을 향해 떠난다. 항주에 도착한 허드슨 테일러 일행을 헌신된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양주폭동(1868. 8. 22)과 천진 대학살 사간에도 꾿꾿이 버티던 허드슨 부인은 병으로 인하여 딸 그레이시가 있는 천국으로 떠나고(1870.7. 23.) 1872년 3월 중국 내륙 선교회(이하 C.I.M)의 책임자로 있던 버거(W. Berger)가 은퇴한다. 1872년 8월 6일 C.I.M의 영국 본부가 설립되게 된다. 첫번째 부인의 사별로 가장 강력한 동역 자를 잃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여성 지도자인 두번째 부인인 폴딩{Jane Paulding)여사와 결혼을 하게되며 1872년 10월 9일 폴딩여사와 함께 중국으로 귀국한다. 1874년1월 27일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9개성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되고 그 해 6월에 주드(Judd)와 함께 무창에 서부 선교지부를 창설 한다. 1874년 7월 26일 허드슨의 자녀들을 돌봐 주던 에밀리 브리췔리(Emily Blatchley)양이 사망한다. 1874년-1875년 겨울동안 허드슨 테일러는 병이 들어 기동을 못하는 상태로 영국에서 지내야만 하는 침체의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875년 1월 9개성에 1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기도에 대한 요청을 호소하고, 1876년 9월 13일에 지부 협정의 체결로 선교의 문이 열린다.
1876-1878년에 내륙 지방을 향해 전격적인 포교 활동이 개시되고 테일러 부인이 최초로 여성 사역 자들을 이끌고 내륙 지방으로 전도를 떠난다. 1879년 가을 조지 니콜(George Nicoll)여사와 클라크(G. W. Clarke)여사가 중국 서부에 여성 사역을 개척한다. 1881년 5월에 한중에서 조지 킹 (George King)여사가 사망하게 된다.
1881년 11월 무창에서 70명의 사역 자를 위해 호소한다. 1885년 캠브리지 7인이 C. I. M 과 Join하여 일행과 함께 출항했다. 1886년 11월 13일-26일에 안경에서 C.I.M 중국 본부 회의를 개최하여 100명의 선교사를 위해 기도를 한다.
1887년 12월에 헨리 르로스트(Henry W. Frost)가 영국을 방문하여 테일러를 미국에 초청한다. 1886년 여름 허드슨 테일러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인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1889년 10월 세계 만민에게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 닿는다. 1889년 11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등 스칸디나비이국가들을 방문한다. 1890년에는 호주를 방문하여 그의 Vision을 호주의 교인들과도 나눈다. 1900년 5월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 선교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1900년 8월 호스트(D. E. Hoste)씨를 C.I.M의 총재 서리로 선임하게 되고 1902년 11월 테일러는 총재직에서 은퇴한다. 1904년 7월 30일 스위스 휴양지에서 테일러부인 폴딩여사가사망한다. 1905년 2월 허드슨 테일러는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하게 되고 1905년 6월 3일 호남성에서 중국과 중국인을 뜨겁게 사랑하며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던 70여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그토록 사랑하던 중국 땅 호남성의 양자강변에 부인과 네 자녀가 잠든 바로 곁에 안장되었다.
II 삶의 방식
허드슨 테일러는 평범한 영국 시민으로 태어나 중국 선교에 획을 그은 놀라운 삶을 살았다.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각양 각색의 환경을 가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조그마한 체구에 약한 체질로서 늘 자신의 육체적 제약을 감수하면서 16세가 되면서부터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삶을 살았다.
허드슨 테일러의 아들 하워드 테일러는 그가 저술한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Hudson Taylor'sSpiritual Secret)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풍성한 삶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던 허드슨 테일러는 많은 비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많은 비결도 알고 보면 결국 하나의 비결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심오한 비 결로서, 어떠한 필요에도-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그리스도의 무한한 풍부를 의지해 는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것을 실천했는지를 알고, 영적인 일에 대한 그의 단순하고도 실질적인 태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들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무거운 짐들을 벗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며, 그 결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최상의 영 적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최고의 영적 경지에서 변함 없는 삶을 살았고 그가 남겨 놓은 선교 사업은 O.M.F 라는 국제적 선교단체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활동하고 성장하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17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헐(Hull)에 있는 하디(Hardey)박사에게 조수로 일하며 의술을 배울 수 있는 개회를 맞아 부모의 곁을 떠나 살면서 자처하여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드레인사이드(Drainside)"라는 빈민촌에 거주한다.
이때 허드슨 테일러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자기훈련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선교사역을 함에 있어 필요한 모든 자금을 하나님께 친히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하디박사는 건망증이 심한 성격 때문에 매월 급여일이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이것을 기도의 응답에 관한 훈련 기회로 활용한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디박사로 하여금 깨 닿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되고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의 100% 공급하심 이것은 중국 내륙 선교회의 사역 윈칙이었고, 오늘날 O.M.F 에서도 이 원칙을 고수하며 공동 제정 원칙 하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운영해 가고 있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도 포기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것들로 풍성히 채워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삶을 증명되었다. 그는 약했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며, 그는 가난했지만 하나님은 부유하신 분으로서 믿음의 사람 허드슨 테일러를 통해 중국에 있는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을 축복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었다.
III 선교에의 접근 원리와 실제 사용법
1853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도착했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중국민족에게 복음이 들어간 것은 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1865년에 테일러는 오직 직접적인 기도와 믿음으로만 지원받는 신앙 선교 사업을 일으켰다. 허드슨 테일러의 초교파적이고 보수적인 선교방식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헌 신자 또한 받아 들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에서 선교를 지도하고 중국인들과 동일시하므로 중국을 복음화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한 중국인들 스스로가 그들의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인 교육계 지도자들을 양성시키도록 권고했다.
1. 보수적 입장
중국에서 19세기에 활동한 수구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공통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선교의 방법 및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중국 땅에 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 사명, 즉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 명을 이루는 선교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기독교의 복음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지상의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구원에 있어서 복음의 권위를 뜻하는 듯하다. 다른 사나는 서구 문화의 권위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복음의 권위에 대조가 되는 입장이다. 이 두 가지 기본 개념이 신겨 선교 초기 중국 사회 상황에서는 적중한 것이었다. 복음의 권위와 문화의 권위가 19세기 중엽까지는 상호 빗대지 않고 그런 대로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복음의 권위와 문화의 권위가 중국 사회 안에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선교 전략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영국과의 수 차례 전쟁을 치른 중국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전통 사회의 질서가 흔들리면서 외국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본 중국은 정치적으로 부패하였고, 사회 도덕이 낙후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도교와 불교의 철학이 그들 나름대로는 심오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종교 의식은 미신과 야만적인 풍속으로 나타나 보였다. 그래서 서방 선교사들은 이런 중국 사회를 구원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독교 복음이라 판단했다. 1877년 상해에서 전국 기독교 선교사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1831-1912)이 연설한 내용은 “우리가 선교사로서 중국에 온 것은 주의 명령을 복종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선교 목적은, 곧 이 광대한 대륙의 중국 민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함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우리는 이곳에서 국내 자원을 발전케 하기 위함도 아니고, 공업이나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 생활의 진보를 꾀함은 더욱 아니다. 다만 흑암의 권세와 싸워,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구원을 얻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중국 정복을 구함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 연설의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선교에서 중국의 사회, 역사, 문화 등의 전통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선교사들의 중국 사회관은, 개인적인 견해로 조명되어 왔으나, 상해 선교사 대회를 계기로 하여, 중국에 대한 인식이 공식적으로 굳혀지게 된 것이다. 이 후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곧 복음의 권위와 서구 문화의 권위 의식에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신학의 보수성을 지향하는 선교사들이 권위주위나 우월 의식을 탈피하지 못한 면도 다분히 있었다. 이들은 이 세상의 문화 생활이나 정치 경제 등을 속된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심판대상으로 여겼다. 허드슨 테일러는 보수적인 선교사로서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신학적 입장
테일러가 본 당시 중국의 실정은 물질문명이나 기술 개발과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방면의 일들이 더욱 필요하고, 이 방면의 일들이 최대 과제라 여겼다. 물질문명의 발달이나 문화적 진보는 신령한 문제가 해결되면, 부수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테일러는 성과 속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이 세상의 물질 방면을 속(俗)이라 하고, 신앙 방면을 성(聖)이라 했다. 그의 말세론은, 성령 충만으로 신령한 생활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 테일러의 이런 사상은 선교의 사업에 있어서 의료 선교, 교육 선교 등에 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1874년 2월 테일러는 그의 편지에서 “만일 의료 사업이 복음전도를 대신한다면 이것은 극단적인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학교나 교육으로 신령한 능력을 대신하여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면, 이것 역시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영생하신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돈과 학문, 구변, 여타의 어떤 것을 의지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C.I.M 역시 교육 선교를 실시했다.1907년까지 C.I.M이 세운 학교는 모두 188개교이며 그 중 122개교는 주간이고 66개교는 야간이다. 주야간 학생 수는 전부 2,997명(야간:1,166면, 주간:1,831명)이나 되었다. 학생들의 대부분을 신자의 자녀로 구성되어 있고, 전부가 초등학교라는 점이 특이하다. 교육과정은 성경을 위주로 했는데 이것은 테일러의 교육방법이었다. 테일러는 또한 다른 C.I.M선교사들에게도 인문지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는 문맹자가 많았기 때문에 세상 지식을 갖춘 교역자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이 사상이 테일러의 생각이긴 했지만 실제로 교육을 받은 교역자들이 많지 않았다. 테일러의 선교 전략적 원리는 신령한 방면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내지 선교회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이 계속되었는데 그 비난은 특히 내지 선교회 선교사들의 자질이 낮다는 데 관련된 것이었다. 19세기 영국인들은 많은 교육을 받는 것을 대단하게 여겼고 따라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은 무시당했다.
내지 선교회 선교사들이 비록 세상 적인 학식은 적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복음의 열정은 탁월했다. 그들은 약탈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중국 내지 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때로는 중국을 복음 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하였다. 그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봉사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병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30년 동안이나 참을성 있게 부모를 돌보았다.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나자 엘리자베스는 3주일도 안되어 50세의 나이로 내지 선교회에 지원하여 합격되었다. 은발이 돋보이는 그녀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존경받았으며 신실하게 사역했다.
3. 정치적 입장
허드슨 테일러의 정치적 입장은 선교사는 선교 현지에서 그 나라 법에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교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본국 정부에 이를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테일러의 이 주장은 당시 중국에 온 외국 선교사들이 현지인 들로부터 받은 재산적 피해나 신변에 대하여 선교사 본국 정부의 역량에 힘입어 배상을 받거나 보호받는 일이 많았는데 테일러는 이것을 잘못된 행위라 생각한 것이다. 이때의 중국 선교사들은 선교사 본국 정부의 비호 하에 활동한 것이 사실이다. 테일러는 선교사들이 본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문제에 대하여 이것이 비록 정치적인 문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중국인들로 하여금 반감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선교사가 본국 정부의 역량에 기대어 피해 재산을 선교 현지인 에게 배상 받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무고한 선교사의 피살로 인하여 무고한 중국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테일러는 특히, 선교사가 선교 현지에서 피 선교국 이외의 국가에 호소하거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성경 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테일러는 선교사가 위협을 받는 경우에는 현지 관리들의 도움을 얻어야 하고, 이 도움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C.I.M은 테일러의 이 정책을 충심으로 고수했다. 으화단사건 당시, C.I.M선교사 58명이 피살되는 엄청난 화를 입고도 희생자들의 인명과 재산 피해 보상을 청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1868년 양주사건 때도 영국 전함의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테일러의 이러한 입장은 서구 제국들의 식민 정책과 선교와의 유착관계를 중국 사회로 하여금 오해를 없게 하기 위한 정신이 깔려 있으며, 더욱이 성경 적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중국에서 사역한 선교사 중 선교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허드슨 테일러와 가장 상반된 노선을 걸은 사람은 티모타이 리차드였지만 세월이 흐른 후 테일러의 방법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4. 순회 전도 법
허드슨 테일러의 현지인 에게 접근하는 선교 방법은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테일러가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문서사업을 중요시하지 않은 이유는 선교의 대상이 문맹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서 사업이 간접선교인 반면에 순회선교는 직접선교방법이라는 데 그 의의를 크게 두었다고 하겠다.
테일러는 원래 중국 내지 선교를 목표로 중국에 왔다. 그러나 그의 이 목표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번 중국 선교회 위원회에 내지 선교 문제를 제안하였으나 그때마다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테일러의 제안을 현실적이 아니라고 바론을 편 것이었다. 테일러는 선교 위원회의 이런 정책이 그 자신의 선교활동에 장애가 되는 것을 직감하고, 1857년 선교 위원회의 선교정책이 성경 적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선교 위원회를 사임하고 기존 선 교부와 형질이 다른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조직했다.
C.I.M은 그 기구면 에 있어서 기존 선 교부와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우선 내지 회의 선교 본부를 중국에 두고 선 교부 운영과 정책 심의권을 현지 선 교부에 두고, 테일러가 이를 총관장한 것이다. 테일러는 현지 사회의 제반 문제를 오직 영적 방면에 기울여 그 나름대로 성경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테일러의 이러한 선교방법은 중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과 그의 내륙 선교를 향한 열정을 다음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중국에 도착 한 후 처음 2년 동안 허드슨 테일러는 무엇보다도 열과 성을 다하여 전도를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중국어 군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내륙지방으로의 전도 여행은 전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10회 이상 이나 되는 전도 여행을 용기외 인내심을 가지고 감행했다.
상해의 서, 남, 북쪽으로 인구가 조밀한 도시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수로를 통하여 모두 접근이 가능했다. 돛단배가 많이 다녔는데 그 배는 낮에는 교통 수단이 되고 밤에는 숙소 가되었다. ..... 불편한 잠이 많이 있었으나, 이 돛단배를 이용하여 가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접할 수 있었고 시야에서 마을들이 떠나지를 않았다. .....상해의 큰 도로와 골 목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그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저 건너”편에 있었다. 한 번도 구원의 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가서 전 해주지 않으면 결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을 위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이 마음은 어느 것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겨울의 추위도, 여름의 무 더위도, 전재의 위험도 그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내륙지방으로 순회전도를 하며 중국에서 개방되지 않은 지역, 한번도 선교사의 발길이 닫지 않은 오지에도 희생과 열정의 결실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5. 중국 의상과 변발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에게 전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자신들의 서구식 복장과 생활방식임을 알게 되고 모험을 시작한다.
외국 선교사들은 주로 상해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상해의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중국 내지의 사정은 달랐다. 여행을 하면서 테일러는 자신이 신기한 존재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그의 복장과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중국인의 옷을 입구 풍습을 따르는 중국인이 되자는 것이었다. 오래 전 로마 카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런 것을 전통적 방법을 떠난 파격적인 것으로서 올바른 선교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옷을 입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
푸른 눈에 회색 머리의 요크셔 출신의 테일러에게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허리에 걸쳐 있기엔 너무 헐렁한 바지, 갑갑한 비단 옷, 굽 없는 신 발등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 살려면 무엇보다 검은 머리털과 변발을 갖춰야만 했다. 첫 번째 머리를 염색할 때 머리에 부은 암모니아가 살갗을 태워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한 소동을 겪으며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의사인 선교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잘 치료해 주어 다시 염색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였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계획을 말고 나갔다. 이번에는 이발사에게 맡겼기 때문에 우습지 않게 잘 염색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 머리털을 밀 고나니 햇볕이 따가워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이런 수고는 값진 결실을 나타내었다. 비록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잘못된 변발을 하였지만 테일러는 이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서도 중국인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다른 중국인들과 섞여 있을 때 당신이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나는 이제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변모된 모습을 테일러는 무척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대부분 불쾌감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테일러를 처음에는 골칫덩어리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런 소식을 듣자 식구들까지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만약 테일러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테일러란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대로 사는 것은 이제 그의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 내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생활하기에는 서양 옷보다 중국 옷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테일러와 동행하며 여행을 하던 윌리암 번즈(William Burns)테일러가 편리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중국 옷을 입고 다녔다.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회의 모든 선교사들이 중국식 복장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원칙을 세우게 되고 일부 선교사들의 심한 반발로 갈등을 겪게 되며, 이 갑작스런 복장의 변화는 문화적 충격(Culture Shock)이 되어 테일러는 그의 가장 측근 이었던 제니 폴딩(Jemmie Faulding) 에밀리 블래칠리(Emily Blatchley)와 도 사이가 벌어졌다. 니콜과 다른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 착용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따로 모여 식사와 기도회를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 지기까지 하였고 테일러의 권위는 흔들렸고 선교회의 내분이 생겼었다.
그러나 결국 테일러가 옳았다는 것이 중국 내륙 선교회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업적을 통해 증명되었고 테일러의 선구자적인 통찰력과 선교사적 삶은 오는 날 타 문화권 선교에 있어 고려해야 할 일차적인 문제에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다.
6.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테일러는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하며 일하면 일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어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다. 매시간마다 1,000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 전역을 복음 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같이 보였으나, 테일러는 한 가지 전략을 세웠다. 만약에 1,000명의 복음 전파 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 각 사람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지만 내지 선교회가 중국 선교에 끼친 공적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1882년까지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 하였고 선교회가 설립된 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했다.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신이 고귀한 의욕임은 분명했지만 대신 그것은 내지 선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그들은 중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에만 가득 차서 중앙 집원적이 아닌 분권적인 제도를 채택하였다. 저명한 선교 역사가인 라투렛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 내지 선교회의 주된 목표는 개종자를 만든다 거나 중국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가능한 빨리 중국의 전 지역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었다...그래서 비록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복음의 조력자로 활용하기는 했어도 중국인 목회자를 훈련시켜 세우는 일에는 소홀하였다.” 이러한 내지 선교회의 선교 정책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과 반발심에서 비롯된 의화단 사건, 수 십년 뒤 공산주의들의 공격은, 지역선교의 강력한 거점으로 건물과 교회의 건축에 우선권을 두지 않은 선교정책이 내부적으로 허약한 갓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전략으로 중국대륙에서의 복음의 확산은 놀라운 것이었으며 그 씨앗은 공산당정권의 대두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믿음의 인내로 시련을 견디어 내었음을 오늘 날 중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하교회들로 생존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IV 평가
1.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에 미친 영향
허드슨 테일러가 기독교 선교에 끼친 공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통찰력과 비전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날 기독교 선교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랄프 윈트(Ralph Winter)는 그를 젊은 영웅이라고 표현하며 그의 업적은 윌리암 케리에 필적한다고 평가하였다. 윈트는 그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대학도 못 가보고 더구나 선교 훈련도 못 받은 채 단지 의료학교의 학력과 과거의 잡다한 개인적 경력만으로 선교 현장에서 활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멸시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 이상의 것을 보여 준다. 그의 초반기의 반 교회적인 선교전락은 오늘날의 선교 개념에 비추어 보건대 잘못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신 것은 그의 마음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굳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드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의 모든 약점들을 채워 주셨으며 그의 중국 내지 선교회-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헌신적이고 종과 같이 협력하는 단체는 결과적으로 한 방법으로 6,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해 중국 내지 사역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테일러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중국 내지의 개척을 특별히 강조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다른 선교회들도 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사후에도 내지 선교회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86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1950년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자 내지 선교회는 다른 선교 단체들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1964년 내지 선교회는 100년 동안 써 오던 명칭을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꿨는데 그 명칭은 아시아 선교에 주력하는 이 선교회의 특징이 잘 반영된 것이다.
2. 긍정적인 측면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접근 원리 중 장점은 선교지 주민의 거부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생활해 왔던 서구식 복장을 포기하고 중국인의 의상과 머리모양을 하고 중국인들에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중국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용이 해 졌으며 중국 내륙 깊숙이 복음을 들고 들어 갈 수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 복음 화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장점은 선 교지에서는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본국 정부에 호소해서는 안되며 그것은 성경 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테일러는 선교사가 위협을 받는 경우에는 현지 관리들의 도움을 얻어야 하고 이 도움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드슨 테일러와 내지 선교회는 중국에서 일어난 폭동에 의해 수많은 피해를 입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했지만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가 취한 입장은 선 교적 측면에서 너무도 훌륭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사의 자질을 신학 교육이나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헌신된 사람이면 평신도라 할지라도 선교사로 선발했다는 점이다. 내륙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비록 학력에선 뒤졌지만 어느 선교 단체보다도 헌신적이었고 그들의 업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평신도 선교사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허드슨 테일러의 통찰력은 선구자적인 입장이었다.
3. 부정적 측면
허드슨 테일러는 문서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선교의 대상인 중국인의 대부분이 문맹자라는 점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선교 여행 중에도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전 도지를 배포했다.
허드슨 테일러가 소홀히한 문제 중 또 하나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략이 없었다는 점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오직 평민대중을 향한 열정으로 불탔으며 그들을 향해서만 복음을 전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비중을 많이 두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점이었다. 중국 현지의 현지인 사역자가 없었다는 점은 중국 복음 화에 문제로 대두되었고 중국 공산당의 탄압으로 선교사들과 선교회들이 추방당한 후 중국현지교회의 영적 빈곤을 채워 줄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V 선교 사역에 도움이 되는 점
나는 허드슨 테일러란 인물에 의하여 많은 도전을 받았다. 선교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던 시절에 S.F.C 간사로 사역하던 교회 선배의 권유로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읽게 되었고, 그때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내게 너무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선교사에 대한 봉사마음을 처음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선교사의 삶과 사역’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그리고 돈 리챠드슨의 ‘화해의 아이’와 레나 테일러의 ‘선교현장 이야기’를 통하여 미흡하였던 선교의 정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나의 비젼은 북한 선교이다. 이제 내가 가야할길을 알 것 같다. 허드슨 테일러의 삶이 바로 내가 가야할 길이란 것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으리란 것..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방법에서 도움을 받은 점은 첫째, 하나님을 100%의지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공급의 원칙을 믿으며, 오직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을 배웠다.
둘째는 선교지 주민을 대하는 허드슨 테일러의 자세다. 풍습과 문화가 다른 중국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허드슨 테일러는 동료 선교사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중국 옷에 변발을 하고 내지로 들어갔다. 선교지인과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배웠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허드슨 테일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중요성을 배웠다. 선교를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빈민가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을 단련하고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더욱 헌신 할 것을 결심하던 모습을 상상하며, 내가 겪는 현재의 고난을 기쁨으로 극복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넷째는 중국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허드슨 테일러에게서 열 방을 향한 사랑과 사랑에 빚진 자로서의 삶을 배웠다. 선교를 위해서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더라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이외에도 허드슨 테일러에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점과 도움이 되었던 점은 수없이 많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과 작은 능력과 부족한 재능을 드려야 겠다고 결심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원칙에서 배운 점을 참고삼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선교대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야 겠다. 나는 비록 미약하고 작으나, 주님께서 들어 쓰시면 그 어떤 고충과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님을 허드슨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겸손하였으나 후에 교만하여 주님께 버림받은 사울과 같지 아니하고, 언제나 기도하고 깨어있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주님께 크게 쓰임 받은 종 다윗과 같이 나의 삶을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다. 나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테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수 많은 북한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할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어릴 때부터 중국에 대한 선교에 대한 열망을 지녔던 것처럼 나 또한 북한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 되도록 그래서 주님께 쓰임받는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며 나아갈 것이다.
교수님께..
한 학기동안 열과 성의을 다하여 가르쳐 주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글의 재주가 없어서 그리 흡족한 원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 한 학기동안 교수님으로 하여금 많은 도전을 받았고, 저희에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비전을 제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학기에도 교수님의 강의를 듣기를 소망하며, 한 학기동안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교수님 방학동안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Ⅵ. 참고 문헌 :
Howard & Geraldine Taylor,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생명의 말씀사, 1993.
이병길, 중국 선교의 어제와 오늘, 개혁주의신행협회, 1987.
Terry C. Hulbert, 오늘의 세계 선교, 생명의 말씀사, 1984.
황태연, 아시아 선교론,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3.
Ruth A. Tucker, 선교사 열전,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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