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관 비교> : 기독교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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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독교의 구원관



1. 기독교 구원관의 개관


기독교는 아담의 원죄로 천하보다 귀한 인간이 죄인으로 타락했으며, 이 죄의 값은 그 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사망이라고 가르친다.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어떠한 공로도 갖지 못하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Sola Gratia). 그러므로 기독교는 타력(他力) 종교이다.

특히, 기독교의 조직신학에서의 ‘구원론 (soteriology)’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구원의 단계와 방법,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을 조직적으로 다루어 인간의 구원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밝힌다.


2. ‘속죄(회개)와 구원’의 교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완전한 기쁨이 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셨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죄의 형벌에서 해방하고 영생에 이룰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아울러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각주:1] 따라서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a)’[각주:2]만 얻을 수 있다.

기독교의 세 분파들[각주: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완전한 기쁨이 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고 영생에의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우리들이 죄와 저주, 그리고 죽음 아래로 떨어졌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와 저주,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게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죄 없으신 분의 죽음으로서 무한한 가치와 공로를 지닌다. 또한,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음에 처하게 했던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공로가 되어 우리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죄와 사망을 이기는 은혜를 준다."

구원론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기독교의 주요 세 분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하나 그 희생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믿는다. 한 마디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a)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엠 2:8-9; 딛 3:5; 롬1:17).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다(요 1:12; 엡 1:7; 고후 5:1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다. 구원은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구원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가. 구원의 단계

(1) 구원의 사건

하나의 사건으로서 구원을 의미하는 성경의 묘사들은 기독교인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본적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구원이란 어떤 종류의 악이나 위험에서 구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음으로 – 이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된다-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구원되었다(사건). 그러나 죄의 권세와 영향에서의 구원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구원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2) 구원의 과정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다는 하나의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종결된 것은 아니다. 죄의 형벌에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죄의 권세로부터도 신자들을 구원해 내시는 작업을 계속하신다.

하나님은 신자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난 후 그대로 방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와 죄의 영향으로부터 계속해서 신자를 구원하심으로 신자를 성화(聖化)시키신다.


(3) 구원의 완성

신자의 구원은 신자가 죄의 권세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됨으로써 완성된다. 이때는 신자의 몸이 영화로움을 입는 때이다.


나. 구원의 의미

(1) 그리스도와의 결합

기독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의 결합’과 범신론에서의 ‘신과의 결합’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기독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인격적 결합인 데 반하여, 범신론에서의 결합은 비인격적 신에 인간 인격이 흡수되어 버리는 특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와 같은 결합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인격성이나 독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결합은 개인의 독특성이나 인격성이 보존되면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아니 단순히 보존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함을 통하여 신자의 인격적 독특성은 더욱 발전 심화된다.

(2) 죄사함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는다. 죄사함이란 문자 그대로 죄를 용서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의 영적 체험과 관련지어 이해하자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장애물인 죄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한 가지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가 범한 죄의 영향 또는 그 결과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칭의(稱義) 또는 의인(義認)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면서 그를 구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칭의이다. 이와 같은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다.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던 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인처럼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대한 내용으로는 ‘침투된 의’, ‘귀속된 의’, ‘심겨진 의’, ‘화목됨’, ‘양자로 삼으심’, 중

생‘, ’성결 혹은 성화‘ 등이 있다.


다. 구원을 위한 영접

(1) 회개

신약 성경에서 ‘회개’라 함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회개가 구원과 관련하여 언급될 때는 최소한 인격의 세 요소가 포함되는데, 즉 지적•정서적•의지적 측면 등이다.


(2) 신앙

신약에서는 ‘신앙’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시인하고 그분께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께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라. 구원의 확신

일반적으로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에서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다(칭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며 산다.


마. 최종적 구원의 보장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그의 일생동안 신앙을 지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죄에서 해방될 것이며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영원한 교제를 누릴 것을 보장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계속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다만 신자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은혜로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십자가 이미지Image by Raheel Shakeel from Pixabay


Ⅱ. 불교의 구원관


1. 불교 구원관의 개관

불교는 원칙적으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력 종교이다. 극락에 들어가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모두 다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또한, 우주의 운명에 체관(諦觀)을 가지고 인욕고행(忍辱苦行)으로 모든 번민과 불안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가려는 체관의 종교이다.


2. 불교의 구원론

불교의 구원은 모든 욕망을 제거하여 열반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은 부존재(不存在) 곧 엄밀한 의미에서의 멸절은 아니지만, 수도의 결과 무아(無我, Anetta)[각주:4]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열반[각주:5]은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세상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무가치하고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란 극복해야 하는 악이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소위 무가치한 세상과 자아에서 벗어난 상태인 불교의 열반은 선도 악도 없는 상태라고 한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악업(惡業)을 제거하고 선업(善業)마저도 버린 상태인 무업(無業)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3. 공덕을 통한 구원

불교에서의 구원은 자기의 노력으로 공덕을 이루어 스스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존재가 쌓은 전생의 공덕이 윤회설에 따라 맞이하게 되는 다음 세상에서의 전진 혹은 후퇴를 결정한다.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는 사찰을 순례하는 것, 승려들의 바랑과 우산을 옮겨주는 것, 불경들을 종려나무 잎에 써서 사찰에 드리는 것, 마루에 거수 합장하고 앉아서 3장 경을 팔리어[각주:6]나 본국어로 듣는 것, 예불(禮佛) 중에 팔리어 경전을 읽거나 달마[각주:7]를 설법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제단에 꽃, 양초, 향을 드리는 것, 승려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 등이 있다. 그러므로 도덕은 공덕을 쌓는 과정이며 그러한 도덕은 단지 열반을 성취할 동기일 뿐 불교의 목표는 아니다.

불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다. 불교는 존재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과 생명과 신체에 대해 또 여자와 가정에 대해 저열한 평가를 내린다. 이들은 무가치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거절하고 자기 개인의 구원에만 과도하게 치중한다.


4. 불교의 목표

「삼장」[각주:8]이 말하는 인간의 모순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서는 그 종교적 목표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삼장」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한 무지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의 문제는 욕망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삼장」에서 욕망이란 탐욕과 애욕과 애착심을 뜻하기도 한다. 욕망이나 집착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반대하는데, 그 가르침이란 소유해야 할 영구한 것이 존재하며, 그것을 소유할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과정 안에 있으며 곧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소유했거나 가졌거나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빼앗기게 되며 그같은 생각의 결과는 고통이다.

불교의 목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여 윤회가 끊어지고 마침내 고통이 끝나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을 일컬어 열반(nirvana)이라고 한다. 「삼장」에서는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열반이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을 말한다. 열반이란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불어 끄다”로서, 존재가 그치는 것보다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버리고 다시 미(迷)의 세계에서 윤회전생을 받을 업인(業因)을 조작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죽을 때 영혼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경전에 의하면, 그런 무지한 질문이 흔히 붓다에게 던져졌다. 붓다는 그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았다. 붓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촛불의 경우를 들어서 말하였다. “불이 사그라진다면 그 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았으며 다만 존재하기를 그쳤다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열반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열반에 이르렀다면, 왜 육신은 계속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과거에 업보가 생겼으므로 그것이 스스로 없어질 때까지 육신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업보는 더 이상 맺히지 않는다. 죽는 순간 쌓인 업보는 분산된다. 열반을 성취하는 일은 일평생 많은 노력을 해야 얻게 되는 길고도 힘든 역경의 길이다. 그것은 보통 붓다의 모든 가르침과 진리를 깨달으려고 승가(僧家)에 들어가지 않고는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5. 종교적 목표를 이루는 방법

종교적 목표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혼란케 하는 세상에서는 목표를 추구할 수 없다. 붓다의 제자들은 승가(僧家)[각주:9]라는, 일반 사회로부터 벗어난 공동체를 형성했다. 승가로 오는 사람들은 성(性)의 구별 없이 모두 환영받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소수였고 엄격하게 격리되었다. 비구와 비구니들은 종교적 목표를 추구하는 일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도덕적인 행실을 하는 일 동의 몇 가지 도움이 되는 것을 받았다.



기독교의 구원관과 불교의 구원관 비교.hwp


  1. 에베소서 2:8-9; 디도서 3:5; 로마서 l:17 등. [본문으로]
  2. 로마서 1:17. [본문으로]
  3.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동방희랍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그리고 개신교(Protestant Church)를 일컫는다. [본문으로]
  4. 무아(無我, anatman)은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anatman, 自我)에 대응하는 말이다. 이 말에는 ‘내가 아닌 것’(非我) 이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는 것’(無我) 이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아트만을 인간에게 내재(內在)하는 보편적 원리로서 실체로 보는 데 비하여 불교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아는 나의 것,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본문으로]
  5. 열반(涅槃, nivana)은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미혹과 집착을 끊어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6. 인도 중부 지대의 언어로 B.C.2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발달한 언어이다.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푸치아 제국에 남아있다. 아쇼카 왕 이후에는 불타의 철리(哲理)를 이 언어로써 설하게 되었다. 팔리란 성전 본문(聖典本文)을 의미하며 팔리어는 아우리아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북인도에 있어서의 유력한 언어로 산스크리트에 대항하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주로 인도 북서부의 주민들 사이에 쓰였기 때문에 이 지방의 방언 요소가 많이 섞여 있으며, 또한 불전(佛典)을 기록하는 문어로서 쓰이게 되면서 산스크리트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5세기 이후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여러 나라에서 남방소승불교의 경전에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7. 달마(達磨, dharma)는 인도의 고전인 「베다」에서 사용된 법(法)이라는 말로, 리타(rta, 天則)와 함께 자연계의 법칙이며,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후에는 오직 인간 행위의 규정으로 사용되어 법칙, 질서 외에 정당, 정의로 변하여 권리의 관념 및 의무, 규범과 같은 의미가 첨가되었다.①법칙 ②진실, 최고의 실재 이외에 ③불타의 가르침 ④경험적 사물 등도 의미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8. 삼장(三藏)의 교리(三法印)로서 “모든 존재는 변화하며 영구치 못하다(諸行無常)"라는 ①무상(無常)과, “모든 삶이 고통이다.”라는 ②고(苦), 그리고 “존재 및 영혼의 영원함을 부정하는 것인 ③무아(無我, anatta)이다. [본문으로]
  9. 우리나라 말의 스님 혹은 중이다. 그러나 이 말은 승가의 본뜻이 아니다. 단체의 의미로 승가 또는 줄여서 승으로 음역하며, 의역으로는 중(衆), 화합중 등이 있다. 본래 삼가(samgha)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된 단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출가 수행자의 교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출가 수행자인 비구[비구니(比丘尼)]뿐만 아니라 재가 신자인 우바새(재가의 남성 신자)를 포함한 4중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에는 출가 수행자의 단체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즉 4인 이상의 수행자가 모일 때 승가가 되지만, 후에 중국 등지에서는 1인만으로도 승•승려로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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