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받은 사람

본문 : 딛 3:5 ; 행 3:1-10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적이고 이론적인 예수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감동 받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3


행 19:1-8절을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세운 에베소 교회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교회생활은 잘 하고 있었으나,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통해 마음에 감동을 받고 더덕 재무장 운동을 펼치는 수준에만 머물렀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이 에베소라는 도시에 가서 그들의 종교실태를 조사해보니까,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매우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와, 신앙체험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신앙생활만을 하고 있었습니다.(1-3절)

그래서  바울은 아주 근본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2절)

그들은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다.“(2절)

당신은 분명히 성령으로 거듭나셨나요?

성령님께서 내가 죄인인 줄 깨닫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새 생명의 구원의 은총을 받으셨다는 확신이 있으신가요?

만일 당신이 교회를 오래 동안 다녔다 하더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요 3:5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

특히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탁월한 사람,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신분상 탁월하고, 시회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듭나야만 구원받습니다. 그가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존경받는 유명인사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보다 착하고, 보다 나은 사람을 만드는 도덕중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새 사람을 만드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거듭나야만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도 심령이 거듭나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도덕이나 윤리가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제도 개혁만으로는 사회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Robert James McCracken이라는 미국의 물리학자는 이런 진지한 선언을 합니다.

“나는 과학자로서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첫째는 구원이란 과학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시대는 그 어는 때보다 도덕적인 부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생명을 주는 종교 없이는 어떠한 도덕적인 부흥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도덕만 가지고는 사람의 근본이 달라질 수 없습니다. 공자 선생님의 논어가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그 속 사람이 본질적으로 달라집니다. 성령님 만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님 만이 우리를 새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저는 신자의 3중 성령체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 중생 체험(거듭남의 신비한 체험)

2. 인격 변화의 체험(성령의 열매)

3. 능력 체험입니다.(성령의 다양한 은사)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치료방법, 곧 therapy의 방법들을 시도해왔습니다. Carl Rogers는 감정을 새롭게 해보라고 가르칩니다. Glasser는 행동수정이론을 제창합니다. 곧 습관교정 이론입니다. Skinner는 환경을 새롭게 꾸며보라고 제의합니다. 그리고 S. Freud는 성적 need를 충족시켜주어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transformation)는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이나 환경 개선을 새롭게 하는데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Rogers는 감정을 Glasser는 행동수정을, Skinner는 환경을, Freud는 성적 need 충족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을 새롭게 해야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적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창 2:7), 사람은 근본적인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변화체험 간증입니다.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2

이처럼 인간의 근본을 바꾸어주시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대로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부어주십니다.

겔 36:26

이것이 베드로가 체험한 제 이의 기적입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차원 기적을 체험합니다. 소위 성령체험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으므로 새 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 2;13


우리 모두 성령을 받으므로 근본이 달라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만이 우리의 내면세계의 마음의 근본 바탕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속 사람의 영이 새로워지게 하십니다.

영이 새로워져야만 삶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집니다.


1. 성전 중심으로 삽니다.

사람이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곧바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성전을 좋아하게 됩니다. 교회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전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사무엘과 다윗이 그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성령 충만함을 입은 후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즐겨합니다. 그래서 성전이라는 말을 6번이나 거듭 반복합니다.(1, 2, 3, 8, 10절)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을 받기까지 날마다 성전에서 찬송하며 보냈습니다.

눅 24:53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안나 할머니 역시 성령의 사람으로서 성전중심의 삶을 영위했습니다.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면 사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좋아하는 성향이 달라지고, 속 사람의 체질이 달려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까이 하고, 성전 출입을 좋아하게 됩니다.


교회 나오는 것이 즐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주의 성전에 나와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람이 새 영을 받으면 성전중심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가 새 영을 받기 전에는 내려가는 삶을 반복했습니다. 믿음이 침체되고 퇴보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새 영을 받기 전에는 아침부터 힘없는 내리막길 인생을 걷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새 영을 받은 후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성전중심의 표상적 모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성전출입을 즐겨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전 중심의 삶을 증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중심으로 삽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 받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기도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오리려 기도는 안하고 졸았다는 보도만 나옵니다. 기도 안한 대신 엉뚱한 소리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 받은 후에는 기도가 생활화됩니다.

30번 이상을 강조합니다.


첫째 규칙적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오후 3시에도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오후 3시에 옥상에 올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enlightment)를 주지만, 기도는 능력(enablement)을 줍니다.


오늘 우리도 새 영을 받으므로 규칙적인 기도생활이 체질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 6장 18절에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중심으로 살 것”을 당부합니다.

다윗과 다니엘은 성령 충만한 사람답게 일평생 동안 규칙적인 기도 생활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맨 먼저 방바닥에 닿는 부분이 발이 아니라, 무릎이 되게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둘째 연합하여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날 새 영을 받으므로 함께 기도의 동역자가 됩니다. 둘은 서로가 성향이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함께 기도하는 기도 둥지가 됩니다. 성령님은 기질과 성향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되게 해주십니다.

베드로는 외향적이고, 남성적이며, 성질이 조급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요한은 내성적이고, 여성적이며, 성격이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령으로 한 마음, 한 열정의 사람이 되어 함께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수록 누구하고든지 화통하게 지냅니다.

성령님은 우리 내면 세계 속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일구어 주십니다.

겔 36:26


그래서 누구하고든지 서로 좋은 팀웍을 이루는 동역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영적 체질이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체질이요, 둘째는 연합하여 기도하는 팀윅 향상입니다.

요즘 경영학에서 “클러스터”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도요타 회사에서 CCC21(Construction of Cost Competitiveness)이라는 ‘좀 더 싸면서도 품질을 좋게 만드는 비용절감운동’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이런 업적의 성취를 위해서는 부품구매, 생산부문, 연구개발, 그리고 부품업체 4개 부서가 한 몸이 될 때 가능하다는 시너지 운동입니다.

최대의 효과를 위해서는 모두가 “한 덩어리”(Cluster)가 되는 시너지 운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충만하여 거시적 비전을 이루는 클러스터 교인, 즉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3. 창조적 신앙으로 삽니다.

성령님은 창조의 영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바꾸시는 역동적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새 영을 받은 사람은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불쌍한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봅니다.(4절)

그러면서 베드로는 돈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빈 주머니를 보는 대신, 자기 가슴에 풍성하게 계신 예수 이름의 권세를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천지가 진동하는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6절)

『은과 금은 내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것의 곧 베드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른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붙잡아 일으켜 줍니다.(7절)

창조적 모험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장애자입니다. 나이도 벌써 40세 정도 되었습니다.(행 4:22)

거기다가 이 사람은 믿음도 없습니다. 성전 문턱에서 돈만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는 창조적 믿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처지에만 급급하여 뒤로 쳐지고 위축된 무기력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역동적인 삶을 삽니다. 성령님은 원래부터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없는 것 대문에 위축되지 않고,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강행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구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요14:12-14, 16:24)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 영을 받은 사람은 창조적인 번쳐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UCLA의 농구 감독이었던 J.Wooden은 ‘할 수 없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방해하지 말게 하고“고 역설합니다.

그래요. 성령의 사람은 언제나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집중합니다. 창조적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최근 영국 런던에 있는 킹스 대학병원의 한 연구보고서에는 유방절제수술을 받은 암환자들 가운데 긍적적인 태도를 취한 사람들은 10명 중 7명이 10년 뒤에도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었고, 절망감을 가진 사람들 10명 중 8명은 이미 죽어 있더라고 말해줍니다.


오늘 이 사람, 40년 동안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이 사람이 나음을 입은 것은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해줍니다.(16절)

믿음으로 고침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신 후 성령의 능력으로 큰 일을 이루신 것과 비슷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이름의 큰 권세를 마음껏 활용합니다. 그래서 큰 기적을 일으킵니다.(4:29-30)

어떤 목사님이 훌륭한 성악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의 노래는 듣고 있으면 초인간적인 힘과 매력에 압도되는데,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악가가 대답합니다. “제가 사사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인간 속에는 “작은 나(little me)와 ”큰 나“(big me)가 있다. ”작은 나“라는 것은 겁쟁이고 미신적이고 약한 나인데,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할 때 ‘작은 자’는 없애고 ”큰, 나“(big me)가 밖으로 나오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요한일서 4장4절에서도 “너희 안에 있는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는 확신을 줍니다.

내 안에는 큰 나이신 새 영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예수 이름의 권세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기를 기준으로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성전에 나와 엎드려 기도하므로 예수 이름의 권세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새 영으느 새 힘을 주시는 부이십니다.

우리 모두 새 영으로 변화르 받아 새로운 미래 지평을 이루어나가는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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