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1-3 / 믿음이란 무엇인가 ?

 

믿음의 본질(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성구(聖句)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믿음에 대한 정의(定義)는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여러 특성들 가운데 하나이며, 명시된 신학적 정의라기 보다는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과 같은 것인가를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믿음"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이며, 그 의미는 "확신, 신임, 신뢰, 믿음" 등을 의미한다. 이제 이 구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Ⅰ. "... 바라는 것들의 실상"

 

당신은 "바라는 것들은 어떠한 실상(實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바라기만 할 뿐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란다는 것을 의미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현재적 실상으로 느끼게 한다.

 

1. 믿음은 하라는 것이다

 

1) 구약 성도들의 소망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단지 하나님의 약속들에만 의지하여 산 구약의 뭇 성도들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의 죄들을 궁극적으로 사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스라엘의 고토가 회복되며 메시야가 통치할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는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5-26)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된 땅에 들어갈 것과 그 곳에서 평강과 안위를 누리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들을 강하게 신뢰했었으며, 또한 소망했었다. 즉, 모든 유대의 어머니들은 구세주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기를 소망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대적에 의해 유린당한 후에 예루살렘이 기필코 회복될 것을 믿었고 또한 아직까지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좀더 완전한 자유와 평강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이러한 약속들의 성취를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이러한 것이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믿음은 대단히 실제적인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며, 믿음은 그 소망을 현실의 실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약속들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현실적이고도 실제적인 소망들 가운데서 삶 전체를 그 소망들에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즉, 모든 구약의 약속들은 미래적인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재 누리는 것들처럼 행동했으며,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며, 또한 이 믿음은 아직 미래적인 것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믿음인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소망

믿음은 어떤 것이 내일 쯤에는 이루어지겠지라고 생각하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하고도 분명한 확실성에 근거한 소망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아주 정상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제 그와 같은 경우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 세상 것들을 경홀히 여김

만일 우리가 쉽사리 볼 수도 있고, 만끽할 수도 있는 세상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는 어렵지않게 안위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결코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들을 따른다면, 우리는 아마 불안과, 고통, 손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와 죽음 등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되며, 그 이유는 뜨거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미래적 소망을 현실적 실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참된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것들을 경홀히 여기는 믿음인 것이다.

 

a. 모세의 경우: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6절에서, 모세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모세는 메시야적인 소망 속에서 살았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와 부귀를 포기하고, 무려 천 오백 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즐겨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이러한 적극적인 소망을 가졌으며, 그는 이 소망을 현재의 확실한 실상으로 느꼈던 것이다.

 

b.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 다니엘서 3장 13-18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살아 있으며 당대에 강력한 권세를 가진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혹시라도 그들이 그 왕에게 순종치 않는다면, 평상시보다 칠 배나 뜨겁게 타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만일 "이러한 시험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를 한 경험론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그 문제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오. 당연히 눈에 보이는 왕에게 절해야 하며, 그리하여 우선은 불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라고 손쉽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만, "나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리하여 풀무불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라고만 대답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것들을 경홀히 여기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 인간의 감각을 경홀히 여김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가진 소망으로 인하여 때로 인간의 보편적 감각과는 등져야 할 때가 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취하라. 또한 당신의 후각을 자극하며, 미각을 돋구는 것들을 맘껏 맛보라. 그리고 당신의 욕구가 미치는 대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손에 넣으라"는 식의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인(世人)들의 생각과는 달리 성경은 "너의 감각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다.

 

- 현실의 쾌락을 경홀히 여김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들로 인하여 현실의 쾌락을 포기한다. 오래 전, 에피큐루스 학파(Epicureans)의 창시자인 에피큐루스(Epicurus)는 인생의 주된 목적이 쾌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세속적인 쾌락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신은, 사람들은 일시적이 아닌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 긴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일시적 쾌락은 곧 괴로움으로 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의 생각은 옳았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즉, 우리들은 내세(來世)에서의 영화로운 삶을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의 작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믿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식의 믿음에 의해 소망하는 미래의 것들을 마치 현실의 것들로 생각하며 거기에 빠져 본 경험이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즉, 당신이 학생이나 직장인의 신분이라면, 당신은 아직 방학이나 휴가가 오기 여러 달 전에 이따금씩 그 날들을 생각하며, 풀장의 한가운데 당신 자신이 즐겁게 수영하는 모습이나 일광욕을 하는 모습, 또는 큰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월척감이 되는 송어를 낚는 모습 등을 상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당신이 신혼 부부라면, 앞으로 낳게 될 어린 아기를 그리워하머 그 아이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맘껏 상상한 적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내가 어렸을 때,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내 나름의 기대감(믿음)으로 실제보다도 더욱 재미있고 즐겁게 상상해 본 적이 있으며, 또한 청년이 되었을 때는 성경 지리를 공부할 때마다, 내가 결코 가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의 한 거리를 믿음에 의하여 맘껏 거닐며 여행하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실제로는 미래지사(未來之事)의 일들을 현재 시점에서 생생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믿음은 단순히 미래의 사실들을 현재의 실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2. 믿음은 실상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실상"(substance)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hupostasis)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가운데 이 1절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쓰였다. 그 하나는 1장 3절이며, 그 곳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로서 묘사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3장 14절로서, 그 구절에서는 "확실한 것"(보증금 또는 권리증서)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실상"(實相)이란 말은 본체(본질)와 확실한 것(확신)을 함께 의미하고 있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언급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들이 장차 본질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들이 본질과 내용과 실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1) 로마서 8장 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실상(實相)을 가졌다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포자기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참을성있게 그것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현재적 실상을 가진 미래의 사실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2) 히브리서 11장 13절

이 구절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언급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천국도 보지를 못했을 뿐더러, 약속들도 받지 못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물론 피상적으로는 그들의 반론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으며, 그들은 천국에 속했던 자로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누렸다. 저들에 대해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10절)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의 것을 현재 손에 쥐고 있는, 어떤 실재의 것으로 느끼는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과 확실성을 주어, 그것을 든든히 붙잡은 것과 같은 확신을 준다.

 

Ⅱ.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1. 믿음은 행동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증거"(evidence)라는 말은 헬라어로 「엘렌코스」(elenchos)이며, 그 의미는 "확신" 또는 "신념"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이다. 사실 이 구절, 즉 1 하반절은 상반절보다도 그 내용이 좀더 진전했다. 즉, 자신이 소망하는 것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운다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토대 위에서 사는 삶이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그분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로 이것, 즉 보지 않고 믿는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이 1 하반절에서는 바로 믿음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지하고 사는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노아와 믿음의 양면성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에게 어느 날,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노아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으므로,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에게는 범상(凡常)한 일이 아니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제 glep(사전에 없는 말로, 예를 들기 위해 사용했을 뿐임 - 역자 주)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과 같다. 당신은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형성하거나 상념을 떠올릴 수가 없다. 노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 물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노아는 비가 오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머리 속에 실상(實相)으로 자리 잡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실재화(實在化)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그의 마음 속에서 "바라는 것의 실상(實相)"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방주를 만들었다(즉, 행동했다는 말임). 그는 방주를 지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일보한 확신인 것이다. 사실, 「비가 무엇과 같을까?」해서 그 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에 대한 상념도 온전히 정립되지 않은 터에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생(生)을 걸고, 무려 120년이나 넘게 불모의 땅에서 방주를 지어 나갔던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토대 위에 그의 생(生)을 세웠다. 아마 노아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방주를 짓는 120년 동안 "노아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자기 자신에게 반문을 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 의거하여 행동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통하여 살펴볼 교훈이다 - 믿음은 믿을 뿐만 아니라 믿은 후에는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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