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8-19(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9 / 아브라함의 믿음
서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하늘나라도, 지옥도, 성경 기자들도, 성경의 원본도, 또한 사람의 눈에는 실체적이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어떠한 것도 결코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러한 것들 위에 우리의 삶 뿐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다.
그런데 나는 믿음 생활에는 몇 가지 특별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요소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을 살피게 되는 이 특별한 본문에 매우 명백하게 지적되어 있다. 히브리서 11장 8-19절은 믿음의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삶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특징지워졌다.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맨처음부터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그의 전생애를 통해 그는 믿음을 따라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이 구절에는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게 될 다섯 가지 특성, 즉 믿음의 행로(行路), 믿음의 인내, 믿음의 능력, 믿음의 확신, 믿음의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영적인 모형이 되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영적인 의미 - 내가 믿는 바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것을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 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특성들은 믿음의 표준이 된다.
믿음의 행로(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만일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으나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위험을 자초하는 사람들로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의깊게 진로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브라함아, 일어나 이 도시를 떠나라. 나는 너를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너는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너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셨으며 그 메시야 안에서 모든 세상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일어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창세기 12-18장의 기록의 전부인 것이다.
Ⅰ. 하나님께 대한 그의 복종
8절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현재 분사로서, 이 구절의 "순종하여"라는 주동사(主動詞)의 동작과 동시에 행하여지는 동작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구절은 "아브라함은 그가 부르심을 받자 동시에 순종했다"라고 표현될 수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었다.
또한 8절 마지막에는 "...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서 "알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는 「에피스타마이」(episramai)로서 "...의 주의를 집중시키다, ...을 생각하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8절의 마지막은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떠났다"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너무도 잘 순종하는 자였으므로 그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가라 하시면 저는 갈 것입니다. 제가 어디로 가느냐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순종의 문제였던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행로(行路)인 것이다.
Ⅱ.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
아브라함은 대단히 죄가 관영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 사이의 갈대아 또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해 있었던 우르(Ur)라는 도시 출신이었다. 우르는 원래 에덴 동산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는 장소로, 후에는 거대한 바벨론 시가 세워진 풍요로운 땅이었다. 아브라함은 이교도 집안에서 성장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호수아 24장 2절의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 다른 신들을 섬겼으며"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한 이교주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뽑아주셨으며, 그의 후손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주권적인 은혜이신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응답했으며 부르심을 받음과 동시에 떠났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로운 자로 선언하셨던 것이다. 자기 고향과 자기 집과 자기 재산을 저버리고 가족들과의 유대를 끊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미래의 불확실한 것을 위하여 자기의 현재 가진 모든 혜택들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로인 것이다. 이것은 행하기가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이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Ⅲ.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믿음의 삶이란, 어떤 사람이 그의 전(全) 인생을 바쳐 온 우상숭배적인 제도로부터 단절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은 이러한 점, 즉 그가 지금까지 생활하여 왔으며 몸담았던 생활 습관을 떠나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오라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생 행로를 따르겠다는 결단임을 말해 주고 싶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를 이교적이었던 것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구원은 분리를 요구한다. 세상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분리가 믿음의 삶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좋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를 어떻게 하실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떠나 당신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행로, 즉 믿음 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을 세상의 질서로부터 분리시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루고 있는 많은 구절들이 있다.
1. 로마서 12장 1-2 상반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
2. 고린도후서 6장 14-16 상반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여기에서는 하나의 신학적인 기초, 즉 빛과 어두움이 합쳐질수 없음이 제시되어 있으며, 실제적인 권고로써 그들을 합하려고 노력하지도, 또한 합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3. 갈라디아서 1장 3-4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구원이란 우리를 세상 질서로부터 취하여 믿음을 좇는 행로, 즉 우리가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미지의 생활 형태 속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요인이 된다. 나는 사람들이 "저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 왔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룩하고 죄없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성경을 읽으며, 교회에 가고 싶어한다는 등등의 말을 듣게 될 때, 그들은 대개 "저런, 너무 부담스런 일이 많은데!"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단히 평범한 반응이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일단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들은 일종의 새로운 가격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지금까지 가치있던 모든 것들은 무가치하게 되며, 지금까지 무가치하였던 모든 것들은 가치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존재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4. 히브리서 13장 13-14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당신은 기꺼이 값을 치러야 하며, 세상의 질서로부터 멀리 떠나야 하며, 예수께서 가셨던 곳으로 가야만 한다. 14절에서는 계속하여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객들이며 순례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예수와 함께 그 질서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5.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6. 야고보서 4장 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7. 베드로전서 1장 14-15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바꾸어 말하자면 "이전에 너희는 무지했었으며 사욕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도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께 왔으니 그것을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15절은 계속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한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8. 베드로전서 4장 1-2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9.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神)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것이다. 구원에는 분리가 따른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상적이란 화투 놀이를 하는 것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술마시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성경의 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 영화관에 가는 것인가? 성경은 영화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에 적용되는 어떤 원리가 있습니까? 무엇이 세상적인 것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때로는 어떠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마음가짐에 관한 말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이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들을 행하는 것을 억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세상적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하여 억제될 수있기 때문이다.
지위 -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책임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행동을 제한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세상적인 일들을 행할 것이다.
스스로 부과한 형식주의 -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싫어하는, 스스로 부과한 형식주의에 의해 제한당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바리새적인 위선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 죄로 인하여 번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체의 압력 -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는 교회에 다니고 있거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단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며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그 무리들과 함께 보조를 맞춘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나는 이런 바보짓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여기를 떠나서 세상에 맞추어서 살아야만 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비록 아무것도 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세상적이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것들 중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으며, 혹은 그것들 모두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장 10 상반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말한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세상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행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때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잃기 시작한다. 당신은 내가 자주 밖으로 나가 은행을 털거나 혹은 간음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러한 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영적 성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영적 성숙은, 당신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수준에까지 성숙하여 가는 과정인 것이다. 믿음의 행로는 당신 자신을 분리하는 것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리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온 정신을 집중하고 성숙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세상적인 욕심들을 잃어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당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다. 당신이 어린 그리스도인일 때, 당신은 "저런, 저 일은 내가 꼭 해보고 싶은데 ... 그러나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니 저 일을 해선 안 되지"라고 말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성숙한 후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모두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실 뿐아니라 당신의 생각과 욕구들의 방식까지도 그분께서 통제하시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흥미진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인 것이다.
믿음의 인내(9-10절)
Ⅰ. 모범
1. 아브라함의 일시 머무는 인생
히브리서 11장 9절은 "믿음으로 저(아브라함)가...우거하여"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일시 머무는 생(生)을 살았다. "우거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로 「파로이케오」(paroike )로서, 이것은 「오이케오」(oike : 거하다)와 파라(para: ... 옆에, ... 곁에)가 합쳐져 이루어 진 합성동사이다. 그러므로 「파로이케오」(paroike )는 "...곁에 거하다"[붙여 사는 것, 즉 기류(寄留)하는 것을 말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9절은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기류하였으니"로 번역할 수 있다.
당신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살았을 때조차도 그가 약속(약속의 성취)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는가? 그 땅에서의 아브라함의 전 삶에서 그는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에게 결코 주시지 않으셨다. 그가 "막벨라"라고 불리우는 작은 묘지를 구입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는 그 땅에 일시 머무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인내해야만 했다. 당신은 그가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저는 과거의 생활로부터 제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제가 정말로 복된 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장막에서 떠돌게 되다니... 이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단히 아브라함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내셨으며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하늘나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이 세상을 통과하는 우리의 인생 행로는 때때로 거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보여 주었던 것, 즉 믿음의 인내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절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설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인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의 객(客)으로 여기고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9절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우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헬라어로 "우거하다"는 말은 「파로이케오」(paroike )인데,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붙여 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민권이 없이 그 땅에 거하고 있는 이방인을 표현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객(客)들이며... 이 세상에서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1)고 표현하셨다. 당신이 이곳에서 단지 객(客)이라면 참고 인내하며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지 말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은행 예금 구좌에 특별 배당 이자 백만원을 만드는 데에 매일매일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생활을 하는 것보다 그 날들을 당신의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 또한 새로운 유행 의복을 보러 다니거나 레크레이션을 위해 돈과 시간을 써버리는 것보다 어린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으로 주일날 아침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낫다. 즉, 당신좌 우선 순위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세상적인 번영과 없어질 재물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참다운 보상을 위하여 일해야만 한다.
2. 아브라함의 시험
아브라함은 고귀한 것들을 위하여 인내로 기다렸으며 계속 하나님 앞에 충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는 단지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었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가장 힘든 시간들은 시작과 종국 사이에 긴 중간 과정의 시간들인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처음에 우르를 떠났을 때는 대단히 신이 났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간 날은 정말이지 굉장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힘들었을 것임이 분명했던 것은 그 사이의 중간 과정의 나날들이다. 믿음의 인내에 대한 실제의 시험은,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즉 일상의 시간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일하고, 기다리고, 자세히 살피는 때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치고 기진맥진하게 된다.
만일 주님이 다음 토요일에 오실 것이라고 알려졌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들이 일하는 것이 토요일까지 끝난다는 것을 알므로. 대단히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들은 믿음의 인내를 잃어버렸다. 하루에 한 번씩 이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음의 인내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의 삶에 예시되어 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서 35년을 보냈는데, 당신은 그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을 한 손으로도 다 셀 수 있다. 그것이 선교 35년의 결과였다! 나 같으면 6개월 후 쯤에는 "하나님, 당신께서는 이것이 제가 일해야 할 장소라고 믿으십니까?"라고 반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윌리암 케리 이후로 인도로 간 모든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윌리암 케리에게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인도의 통용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35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수행되어진 모든 다른 선교사들의 노력은 케리의 사역에 기초하여 진행되어 온 것이다. 나는 그가 믿음의 인내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알았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가 3년만에 항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그것이 믿음의 인내인 것이다.
Ⅱ. 관련 성구(聖句)
1.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
바울 사도는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바울은 그들이 상황이 어렵게 될 때 그것을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2.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3. 야고보서 1장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 야고보서 5장 7-8, 1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당신은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두 주일 동안이나 주님께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언제쯤 그분께서는 그것을 해결해 주실까요?"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참음으로 기다리라. 나는 어떤 일을 위하여 30년, 40년, 50년 아니 60년까지도 기도해 온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일들을 위하여 몇 년 동안 계속하여 기도해 오다가 때때로 믿음의 인내가 떨어져 버린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제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그 일을 결코 행하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내하라. 그것이 아브라함의 삶을 완전한 믿음의 삶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믿음이란 의심에는 귀머거리가, 실망에는 벙어리가, 불가능에는 장님이 되는 것이므로 오직 성공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Ⅲ. 아브라함의 시선(視線)
당신은 "아브라함의 인내의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는 그렇게 인내할 수 있었지요?"라고 질문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0절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城)을 바랐음이니라."
당신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가? 그는 아랫 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인내했던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성"과 "터"라는 단어 앞에 각각 정관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그 터가 있는 그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다. 즉, 아브라함은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인내했던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인내이다.
1. 에스겔서 48장 35 하반절
"...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 하리라."
만일 우리가 그 곳,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그리고 그 성(城)에 있게 될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2. 골로새서 3장 2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리의 목을 걸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가 땅엣 것들에 애착을 갖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당신이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 창세기 13장 12절
롯은 아브라함과는 정말 대조적이었다. 아브라함은 땅에서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초라한 낡은 장막 안에서 생활했으며, 가나안 땅 전역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녔다. 그러나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성경은 말한다. 롯은 세상의 좋은 것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롯은 세상적인 것을 바랬으나 아브라함은 하늘의 것을 바랬다. 아브라함은 땅의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롯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만일 당신이 계속적으로 이 세상의 것들 - 고난, 어려움, 싸움, 돈, 명예, 재산, 향락 등등 - 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참을 수 없는 육신의 욕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늘나라와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다면 당신은 이 땅에서 진행되는 것에 관하여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될 것이다.
4. 디모데후서 2장 3-4 상반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 즉, 이 말씀은 당신이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면,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5. 히브리서 11장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참았으며." 어떻게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양을 치면서도 참을 수 있었을까? 27절은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 같이 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상으로는 "...하는 동안"을 뜻한다. 따라서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고 있던 동안에 참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그의 주변 상황에 의해 결코 방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항상 올바른 곳에 그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6. 히브리서 12장 1 하반절-2 상반절
"...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며 경주를 해야 한다. 당신이 경주하고 있는 동안 당신의 발을 쳐다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는가? 당신은 그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질 뿐아니라 다른 것들과 부딪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멀리 있는 결승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결승점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의 눈을 맞추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할 때에만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얼마나 결승점에 가까와졌는지를 알 수있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5미터 앞을 바라보면서 경주한다면 당신은 5미터가 넘는 어떤 곳도 결코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결승점을 결코 바라보지 않는다면 당신이 거기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매일매일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하루하루임을 기억하고 있을 때 그 경주는 인내하며 달려가기가 쉬워질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36절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저는 오랫동안 주님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이익들도 손에 쥐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내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인내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일이 풀리지 않게 되자 "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지 ? 오, 나의 세상이 무너져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인내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위엣 것에 매달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때가 되어 모든 일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근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6상반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믿음의 능력(11-12절)
믿음은 위력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며,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며, 불가능한 것을 성취시키기 때문이다. 믿음은 필수적으로 능력을 동반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라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나이는 아흔 살이었고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이었다. 그들 모두가 자녀를 생산할 나이가 지났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2절에는 계속하여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후손의 후손을 낳았으니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그의 후손인 것이다. 이미 태어났거나 혹은 앞으로 태어날 모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니 ... 이 모든 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있는 것이다!
1. 마태복음 19장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3. 누가복음 18장 27절
예수께서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나 하나님을 믿었기에 기도하여 온 무엇이 있는가?
4. 마태복음 17장 19-20절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5.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6. 에베소서 3장 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당신은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이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당신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우리의 믿음을 더욱 크게만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더욱 더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확신(13-16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의 땅이 자신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러나 13-16절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그들은 그들이 나온 본향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있는 것이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불리웠던 사실을 주목해 보라. "외국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세노이」(ksenoi)이다. 고대에는 외국인의 운명이란 정말로 모진 것이었다. 외국인은 적의와 의심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 단어는 "망명자"를 뜻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 단어의 최악의 의미로 볼 때 "유랑자"였던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그네", 즉 「파레피데모이」(ptrepidemoi)라고 불리웠다. 이 말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변화하는 모래 위에 있다는 것과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일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무엇인가 더 위대한 것을 추구했으며, 비록 그들이 그것을 본 적이 결코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에 관해 확신하고 있었다.
Ⅰ. 우리의 안전
당신은 하늘나라를 확신하고 있는가? 정말로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의심을 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하늘나라를 확신하고 있다.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있음을 안다. 이것은 사실이며, 나는 하늘나라에 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1. 시편 27편 4 상반절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라고 말했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으로, 곧 신자의 안전이다.
2. 욥기 19장 26-27 하반절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욥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빈궁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던 것이다.
3. 빌립보서 1장 23절
바울 사도는 사실상 빌립보 교인들에게 "여러분들 주위에 내가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나는 여러분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은 훨씬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안전인 것이다!
Ⅱ. 우리의 특별한 영광
16 하반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城)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부끄러워 하시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그분을 믿고, 믿음으로 참되게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는 죤 맥아더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정말로 신기하지 않겠는가? 사무엘상 2장 30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는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죤 맥아더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족장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도 저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무어라고 부르셨는지 아는가? 출애굽기 3장 6 상반절에서 하나님께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후에는 그분께서 죤 맥아더의 하나님도 되셨던 것이다. 나는 믿음의 삶을 사는 것과 나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기를 원하시는 그분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어떠한 영광도 생각할 수없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다.
믿음의 증거(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기사(記事)는 창세기 22장 1-18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끝까지 기다린 후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와 그를 번제로 바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했던 것이다. 그는 도구를 챙기고 이삭과 두 명의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출발했다. 삼일 후 그들의 목적지가 보이자 아브라함은 그와 함께 있었던 두 젊은이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고 말했다.
당신은 "아브라함, 잠깐 중단하고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선 다름 아닌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조건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에서부터 일으키실 것을 믿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 얼마나 굉장한 믿음의 행위인가!
이것을 대단한 믿음으로 여겼던 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즉, 아브라함의 모든 꿈은 이삭에게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어떤 혼란이 있었다. 그는 자손이 생기리라는 약속의 첫번째 표시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기 때문에 이삭을 몹시도 사랑했다. 그는 하갈과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취소하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을 금하셨다. 창세기 9장 6절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라고 말했다. 이 모든 생각들이 아브라함의 머리 속을 스쳐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 만일 당신께서 내가 그를 죽이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저는 당신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저에게 그가 후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바치며 "하나님, 저는 당신의 약속들을 믿기에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 그를 제단 위에 눕혀 놓고 그의 아들을 베기 위하여 칼을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그를 불러서 멈추게 했으며, 대신 희생을 드릴 수양을 제공해 주셨던 것이다. 그 후로 이삭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한 모형이 되었다.
"...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면 믿음의 마지막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희생적인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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