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구원개념

2011. 6. 27. 14:16


 신약의 구원론

▷ 서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은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전체는 구원에 관한 계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의 축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그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예수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구원’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적 논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부분 구원론과 연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든가 구원의 방법에 관한 설교들은 교회사와 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예정해 놓으셨는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은 기독교 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는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일치되는 견해이지만 구원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믿음에 관한 개념은 저마다 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개념을 살펴보고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믿음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 본론

 1. 신약의 구원개념


(1) 신약의 구원용어의 개념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에서의 구원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예표적 사건 또는 그림자로서 이해한다. 예를들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사건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의로 정하실 사건에 대한 예표로서 이해하며(갈3:8) 출애굽 사건은 말세를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거울과 경계가 된다고 보았다(고전10:11).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몽학 선생으로서(갈3:24)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었다(갈3:19). 심지어 노아 홍수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표가 되며(벧후3:6-7)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킨 노아홍수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구원하는 표가 된다고 이해한다(벧전3:20-21)

특히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구약의 구원사건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해석되어지는 것이 정당함을 역설한다(고후3:14).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을 언급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고하여 모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계시키려는 의도를 보인다(히11:26).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의 진정한 구원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의도적으로 연관시켜 구약의 구원사건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연결지우려 하였다.

신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σωτερία는 일차적으로 심각한 위험으로부터의 인간 혹은 신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용어들은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때때로 이 용어들은 생명을 지키는 것, 예를 들면 사면이나 보호나 궁핍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나 불로부터 지키는 것 등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건강을 지키는 것이나 유익을 끼치는 것들을 가리키기도 하였으며 내적인 존재나 본질을 보호하는 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1) 신약에서는 질병을 낫게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빈번하게 사용되며 소극적으로는 메시야적 심판의 형벌로부터의 건짐이나 메사야적 구출을 받는 것을 가로막는 악들로부터 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2)


(2)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구원개념에 있어서의 특징

1)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첫 사역의 시작을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기록한다. 누가복음 4:43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가 자기 사역의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듣게 된다. 신약의 모든 말씀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은 그 내용이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라고 할 수 있다.3) βασιλεια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그 나라의 등장이나 도래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왕국을 가리킬 수 있다.4)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 가장 괄목되는 것은 죄를 용서해주는 축복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전유권이지만 예수님에게도 주어졌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축복함으로써 그의 왕적 활동을 보여준다.5)“회개”는 사실상 도래하는 나라를 기다리면서 인간편에서 해야하는 모든 것을 요약하는 말이다.6)

2) 구원자로서의 예수

구약에 있어서는 여호와 한분만이 구원의 주체임이 강조되었다. 비록 사람이 구원의 수단으로 쓰임받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여호와가 구원의 주체인 한에서 여호와의 능력이 임재하는 상황속에서였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의 능동적 주체는 될 수 없었다. 예수 역시 자신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요5:19, 요7:29, 요8:28, 요12:49, 요14:10) 자신이 직접 구원의 능동적 주체임을 나타내기도 한다(마18:11, 눅19:10, 요4:14,, 요6:44, 요10:28, 요14:6). 예수는 구원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요3:18, 요7:38, 요11:25-26, 요12:44, 요14:11). 자신의 위치에 대한 예수 자신의 관점은 그의 “강조적 εγω”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권세있는 선언으로서 사용된 εγω는 αμην과 관련되는데 따라서 그것은 신적권세로서 말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중적인 왕적권세 곧 사죄와 입법을 주장하는 것이다.7)

3)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공관 복음서에서는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은 변함이 없으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구체적으로 요구되어진다.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하는 구절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구절 그리고 믿음의 유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마8:13, 마8:26, 마9:2, 마9:22, 마9:28-29, 마14:31, 마15:28, 마21:21, 막4:40, 막5:30, 막5:36, 막9:19, 막9:23, 막10:52, 눅7:50, 눅8:25, 눅8:50, 눅17:19, 눅18:4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언급은 주로 병자와 죄인에게 선포된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들, 죄인들과 병자들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눅19:10, 막2:17)

예수의 구원의 대상이 구약에 있어서의 구원의 대상과 불연속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눅4:19절에서 예수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여호와는 저는 자를(습3:19), 온유한 자를(시76:9), 곤고한 백성을(삼하22:28), 겸손한 자를(욥22:29), 마음이 정직한 자를(시7:10), 부르짖는 자를(시55:16),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시38:18),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시86:2), 앙망하는 자를(사45:22), 성실히 행하는 자를(잠28:18)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에 있어서 심령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과 죄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동일시 되어진다. 또한 여호와는 자기백성을(삼상9:16, 삼상14:23, 삼상17:47, 삼하3:18), 자기 양떼를(겔34:22) 구원하신다는 기본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을 읾어버린 자를 찾으러 온 자로서 이야기한다(눅19:10). 회개한 삭개오에게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의 이와같은 의미를 배경으로하여 누가복음 19:10에 있는 “잃어버린”을 “영원한 죽음”이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8)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으러 오셨다. 아브라함의 자손과 유대인은 예수에게 있어서 동일시되지 않는다(눅13:28, 요8:39-41). 할례자체는 외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임만을 나타내는 것이며(요8:37)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요6:44). 믿음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조건이 된다(요8:10-12).

 4)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예수께 있어서는 구약의 ‘전쟁에서의 구원’의 개념이 문자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원수나 대적은 영적인 세력인 사단으로 또는 악이나 질병으로 지칭된다. 예수는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한다(마9:12~13). 예수는 죽음에서(마9:25) 질병에서(마9:20-22, 마12:13) 신체적 장애에서(마9:27-30) 수고에서(마11:28-30) 귀신들림에서(마15:22-28) 배고픔에서(마14:19, 마15:32-37) 죄에서(막2:5) 사단의 권세에서(눅13:16) 영적인 주림과 목마름에서(요6:35)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을 구원하신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전인적인 분야에 폭넓게 나타난다. 그의 치병사역은 자신을 향한 회개와 믿음에로 이끄는 매개체로서 사용되어지며(마11:2-5, 요9:35, 요10:37-38, 요11:14-15,요17:12)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임재로서 나타난다. 


(3) 오순절 사건이후 사도들의 구원이해의 특징

1)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죄사함중심

사도들에게 있어 예수의 십자가 상의 죽으심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롬3:24-25에서 예수를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워진 존재로서 이해하며 십자가 사건을 구속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를 삼게 된 것이다(고후5:21). 그러므로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행동이다(갈1:4).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된 경건치 않은 죄인들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다(롬5:6-11). 즉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고후5:14,19).

히브리서 기자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써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히7:24-28). 그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제물이 되었다(히9:28).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벧전1:2).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벧전1:3). 구속은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어졌다(벧전1:19). 예수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

누가복음에서의 사가랴의 기사에서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구원의 성격에 대한 몇가지를 예언한다. 곧 일어날 구원의 사건은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눅1:69)이며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눅1:77)이다. 그러나 또한편 시므온은 아기예수에 대하여 ‘비방받는 표적’과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임을 은밀히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것임으로 이해된다(요일3:16). 요한에게 있어서도 예수님은 화목제로서 이해된다(요일4:10).

2)성령의 내재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행2:38). 성령의 내재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신자안에 내재화 된 것이다. 성령의 내재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며(롬8: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자들이다(롬8:23). 바울은 여러 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하면서 성령의 내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인 것으로서 이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살게 되며(갈5:25) 성령을 좇아 행할 것이 요구된다(갈5:16). 사도행전에 있어서 성령을 받는 사건은 종말론적 구원의 역사로서 이해되며(행2:14-33) 구약의 성취적인 사건으로서, 새언약의 증표로서 이해되어진다.

3)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갈2:16).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3:5).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며(갈3:9) 약속을 받게 된다(갈3:2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갈5:6).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나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이유는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않았기 때문이다(히4:2). 구원에 있어서 믿음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며(고후13:5) 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약2:16-17) 심지어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로 이해된다(롬14:23). 이 믿음은 보배로운 것이며(벧1:1) 끝까지 힘써 싸워 지켜야만 한다(유1:3).

4)현재성과 미래성

예수께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도 현재성과 미래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구원이 시간과 어떻게 연관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그것은 신자의 생활 초기에 발생되고 전생애를 통해서 계속되는 과정으로 혹은 미래의 사건으로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어떤 신자들은 구원을 신자의 생활 초기에 근본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여 우리는 구원받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구원이란 미래에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9)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았으며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은 자로서 서술된다(엡2:5-6).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롬3:20) 어떤 존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끊을 수가 없다(롬8:39).그러나 구원은 신앙안에서 경험되어지는 미래적 사건의 현존이다. 그것은 즉각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눅19:9). 그러나 종말론적인 구원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긴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였으며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을 권면한다(빌3:12-16). 많은 곳에서 구원은 미래의 사건으로 나타난다(빌2:12, 딤전2:15, 딤후4:18, 히9:28, 벧전2:2). 이러한 구원론적 긴장 속에서 두렵고 떨림이 필요하며(빌2:12)  인내로써 시험을 참는 것과(약1:12)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이 요구된다(벧전1:13).


2.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개념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대답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믿음과 관련한 구약의 원어를 살펴보는 것이 문제를 쉽게 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하여 행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일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의 인물이 기대했던 구원과 신약의 인물이 기대했던 구원의 의미가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또한 자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어지는 믿음의 개념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차라리 어떤 믿음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가와 어떤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갈3:23에서 ‘계시될 믿음의 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계시될 믿음의 때 이전은 ‘믿음이 오기 전’으로 사도 바울에 의하여 구분되어진다. 사도바울이 말한바 계시될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율법의 경륜의 정점으로서의 그리스도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논함에 있어서 구원의 의미를 예수께서 원래 의도했던 종말론적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시작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1) 예수께 있어서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개념

1) 8복의 특징을 나타내는 믿음 -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이다. 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요소들은 8가지의 전제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빈번하게 자신이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왔으며 건강한 자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찾으로 왔다고 언급한다. 자신이 죄인임과 병든 자임을 깨닫고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께 있어서 믿음이란 8복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믿음은 율법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마5:17-20). 예수는 모세의 법의 양상들은 반대했지만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10) 그러나 또한 명백하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못 박는다. 예수는 문자적인 율법에의 준수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

 예수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탄에 대한 미래의 종말론적인 승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현재적 사건이다.11)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완성의 동시성 속에서 언급하며 굳이 구별하려 들지 않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믿음을 강조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거의가 치병사건과 관련한 기사에서 언급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하는 데 있어서 믿음의 반응이 요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영혼에 관계될 뿐 아니라 전인의 구원에도 관계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언급에서 독특한 점은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자신과 또는 자신의 사역과 관련을 짓는다는 것이다. 침례 요한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나라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의하여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예수 자신은 자신의 선포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것을 알린다. 마태복음 12:28에서는 예수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으로 말한다. 예수께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나라와 동일시 하며(요18:36)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되며(요14:7) 자신을 믿는 자는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요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요12:44)이며 자신을 본 것은 하나님을 본 것과 동일시된다(요14:9). 즉 예수는 구약의 여호와께 향한 신앙을 자신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구약의 여호와가 언약의 백성들에게 계명을 준 것처럼 예수 자신도 그 자신이 계명의 입법자가 되어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한다(요13:34).


3) 회개가 전제되는 믿음

예수님의 회개의 요청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에(마4:17) 복음을 믿기 위한 필수적인 전단계로서 요구된다(막1:15).  물론 이것은 논리상의 구분일뿐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죄인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도, 그 축복에 참여할 수도 없는 것이 지극히 거룩한 메시야 왕국의 성격이다.12) 복음의 역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역사와 동일하게 이해된다(눅24:47).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는 것은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것으로 묘사된다(마9:17).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병든 자임과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음을 말하며(눅5:32)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임을 말한다(마5:3~4). 예수에게 있어서 회개란 다양한 국면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회개(μετανοια)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에 의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13)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요3:16).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한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행11장에서의 베드로와 유대인 크리스챤의 논쟁의 내용 속에서 입증된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함께 먹은 사실을 비난하자 베드로는 고넬료가 복음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성령을 받은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성령)을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을 이야기하자 할례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인정한다(행11:18). 그들이 이해한 회개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전제로서 행2:38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회개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예수를 믿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수께서 말한 회개는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언약 공동체에 대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선포한 것처럼 그 연장선에 서서 동시에 자신에게로 전인격적으로 돌이키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에 순종하는 것과 자신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주되심과 그에 따른 순종함이 전제되어야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자신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한편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회개하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이다. 요한계시록2:5,16,22;3:3,19에서는 명령형으로 모두 μετανόησον을 사용하였다. 단순과거 명령형은 현재명령형과 의미상의 차이는 없고 어떤 과거의 뜻이 포함된 것이 아니고 다만 계속되거나 반복되지 않는 어떤 동작을 명령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단순과거형 명령형을 사용하게 되면 단회적으로 회개하라는 의미가 되며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면 회개하는 일을 계속하여 반복하라는 뜻이다.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마3:2; 4:17, 막1:15는 모두 μετανοειτε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회개의 영속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 땅의 생활에서 완전한 회개는 있을 수 없다. 마음에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만큼 믿음이 완전해질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마음의 완악함에서 완전히 해방될 만큼 우리의 회개가 순전할 수도 없다. 회개는 전생애에 걸쳐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보다 더 깊은 회개를 위하여 매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14)예수께서 말씀하셨던 회개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임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다른 말로 말하면 성화의 삶-까지도 내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의미에서만 회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원래의 의미를 축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행2:38에서 사도행전 기자는 단순과거형을 사용하여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촉구한다. 행3:19에서는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서 역시 단순과거 형을 사용했다. 여기서의 회개란 복음을 믿으라는 요청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베드로가 회개하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너희 유대인들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는 요청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회개하라는 의미는 마음을 예수께로 향하여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요청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의도하셨고 성경전체에서 언급되는 회개를 모두 지칭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제자도로서의 믿음-예수를 따르는 믿음

예수는 미래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하실 때 믿음의 유무를 언급하기 보다는 주로 행동을 요구한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행동이란 제자로서의 행동이며 자신을 신뢰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믿는다는 것과 믿는 대상을 따른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믿음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의 기초에서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구원에 이르기 위한 요건으로 자신을 향한 믿음과 함께 제자도를 요구한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마16:24)을 요구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마19:29). 아비나 어미보다 예수를 더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마10:38). 예수 자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 자신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자는 예수의 제자일 수 없고 복음을 믿는 자가 될 수 없다. 예수께는 복음을 믿는 사람과 제자를 구별되지 않는다(마28:19, 막16:16).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와 일치된다.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할 때 그것은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간 ‘따름’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예표일 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6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는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다른 차원의 것임을 밝히신다. 베드로가 목숨을 버릴지라도 예수를 따르리라고 말하자 예수는 세 번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한다.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위하여 예수를 부인한다.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부인하는 것이며(마10:39)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철저히 죽이는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상태,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향하여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2) 바울에게 있어서의 구원받는 믿음의 요소

1) 로마서 4장-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로마서 4장은 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에서 복음을 핵심적으로 소개한 후에 1장 18절에서 3장 18절까지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논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즉 율법의 목적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며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다. 이어서 3장 20절부터 31절까지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로마서 4장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실례이다. 바울이 로마서 4장을 통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에 관한 것이지 결코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영적이지 못한 어떤 것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율법은 신령한 것이며(롬7:14) 선한 것임을 인정한다(롬7:16).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임을 언급한다(롬3:2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외에 나타난 것이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롬3:21).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도 바울 자신이 고안해낸 신학적인 추론이 아니라 성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또한 성경에서 예언되어지고 뒷받침되어지는 것으로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4장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며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벽을 은연 중에 허물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의 구원받는 믿음에 관한 몇가지 강조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롬4:5)

둘째,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롬4:12)

셋째,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롬4:24)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가지는 같은 것을 말하면서 조금씩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구속의 역사에 초점맞추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관련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롬4:5)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롬4:24)는 모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약속의 성취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약속을 배제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바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시점과 할례를 받은 시점을 비교한다. 그것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대조시키려 하는 의도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 전제되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가 구원에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받는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약속에 대한 즉각적인 믿음 뿐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면도 구분하지 않고 서술한다. 이것은 바울의 믿음이해가 헬라적인 사고에서보다는 히브리적인 사고에 기초해 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구원받는 믿음을 논함에 있어서 믿음의 즉각성과 지속성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믿음은 지속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ʿΟ δε δικαιος έκ πιστεως ζησεται)는 구약의 인용은 단순히 죄인이 믿음으로 거듭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러한 의미라면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라는 해석과 의인은(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해석 모두 가능하다. 또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구약의 희생제사의 연속성 속에서 대속적인 죽음으로 이해한다(롬3:25).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사건을 믿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우리의 주’로서 바울에게 일컬어진다. 로마서 24-25절에 있어서 구원받는 믿음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사건을 믿는 것과 예수를 주로 신뢰하는 것,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2)로마서 10장 9-10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마음과 입으로 믿는 믿음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바울의 구원관을 대표하는 구절로서 빈번하게 인용되는 구절이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6-7절에서 인용한 신명기 30:14에 나오는 사람들의 ‘입’과 ‘마음’에서 단서를 얻어서 이제 복음을 그런 관점에서 요약한다. 마음과 입, 내적 믿음과 외적 고백은 필연적으로 한데 결합되어 있다. 믿음없는 고백은 헛된 것이다... 하지만 이와 마차가지로 고백없는 믿음은 가짜처럼 보일 것이다.15)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러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잘못 인용되어지는 구절 고린도전서 12장 3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는 구절은 입술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입술로 예수는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거듭난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요즈음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말로서 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을 다른 본문들과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해석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이방인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요구되어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라든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상황등에서이다. 그러한 예는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신앙고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절에서 이방인들의 황홀경 속에서의 예배를 상기시킨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은사의 출처를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은사가 모두 신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악한 영으로부터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는 누구로 말미암아 온 것인지 분별되어야 한다. 특히 엑스타시 속에서 예언되어지는 것들은 분별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모임 중에 이상한 예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한 예언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1서 4장 1-3절에는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적인 삶을 도케티즘적으로 부인하는 이단이 발견된다. 고린도 교회도 잘못된 은사도 종종 발견된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는 주시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이기도 하며 의심할 바 없이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의도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신적인 영감을 받는 현상과 더불어 엑스타시 속에서의 예언을 다루고 있으며 어떻게 그러한 예언이 분별되어질 수 있는 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3절에서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하는 주체는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예언하는 자에게 임한 영인 것이다. 따라서 3절에서 말하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언명을 가지고 예언하는 자의 믿음의 진정성을 분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모든 신령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신자에게 있는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제시될 수는 없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근거로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시도들은 한국 교회 안에 많이 일반화 되어 있다. 목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자에게 믿음의 확신 또는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시도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구절을 비성경적으로 적용하면서까지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분명히 ‘예수는 주시다’라는 고백을 기초로 교회의 성원으로서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예수는 주시다’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의 맥락에서 고백되어질 때 유효한 것이다. 즉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맥락 속에서이다. 바울은 마음의 변화 또는 마음의 할례가 없는 믿음을 결코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의 믿음관이 히브리적인 사고에 우선적으로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말한 바 마음으로 믿는다는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단순히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동의나 교리적인 지식에 대한 동의라는 의미로 마음으로(εν τω καρδια)를 쓴다고는 볼 수 없다. εν τω καρδια는 9절의 입으로(εν τω στοματι)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과 대응하여 내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9절과 10절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9절의 ‘너’가 누구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9절의 너는 편지를 받는 로마교인들이라고 볼 수 없다.왜냐하면 이미 바울은 로마교인들을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로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8). 9절에서 마치 바울은 불신자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다. 로마서 9장-11장은 유대인들의 구원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10장 1절에서는 바울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2절과 3절에서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음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4절부터 8절까지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았던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을 신명기 30장 12절과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강조한다. 그리고 나서 9절이 시작되어진다. 그러므로 ‘너’라는 표현은 문맥상으로는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신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너’를 불신 이스라엘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는 의미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해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적인 죽음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요청인 것이다. 문맥상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교적인 상황 속에서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예는 요한복음 12장에서 발견된다. 관원 중에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으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드러나게 말하다’는 말은 όμολογεω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로마서 10장 9절의 시인하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즉 관원들은 예수를 마음으로 믿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믿음의 고백 때문에 불이익이나 어려움이 당할 것이 두려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고 말한다. 그러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될 수 없다.

반대의 예가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한다. 마술사 시몬은 빌립 집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행8:4). 초대 교회의 전도에 있어서 적어도 침례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기본적인 고백이 없이는 베풀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가 적어도 예수 믿는 믿음을 외적으로 고백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침례를 받은 시몬은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다녔다(προσκαρτερον). 그러던 중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베풀 때 성령을 받는 것을 보자 돈을 주면서 자신도 안수하면 성령을 받도록 하는 권능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책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므로 이 도에는 시몬이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지적인 동의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이 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전인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메시야로서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가 예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공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인하여 다가올 어려움들에 개의치 않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당시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신앙적인 결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인하여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함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바울은 순종없는 믿음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것과 동일시된다(롬6:1-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갈5:24). 그리스도인들이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롬6:15). 입술로 누구를 주로 고백하느냐가 주종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에게 순종하느냐가 주종관계를 결정한다(롬6:16).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과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개념은 동일하게 인식된다(롬6:17-18). 그러므로 육체의 일에 계속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전6:9, 갈5:19-21).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와 연합한다는 개념역시 분리될 수 없으며(롬6:3-5) 마음의 할례와도 분리되지 않는다(롬2:28-29).

바울은 예수를 믿는 것과 회개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었다(행14:15).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에게서 불순종하는 믿음을 생각할 수는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회개는 근본적으로 복음을 믿는데 있어서 전제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개가 요청된다(고후7:10). 바울은 구원이라는 개념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현재적 구원이나 과거적 구원 미래적 구원이라는 말로 구분짓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어느 한면이 강조되면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사이에 있는 거룩한 긴장을 상실할 수 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이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회개를 지연시킨다면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나와져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바르지 못한 관계성 속에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 불순종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요청되는 시점에서 신자의 안전을 이야기 하는 구절은 없다. 그것은 복음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평안이 없을 때 평안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을 기다리고 계신데 목사가 구원의 확실함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은 성경의 콘택스트에 일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삶의 정황과 일치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자들의 믿음관은 히브리적이라기 보다는 헬라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바를 오늘날에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기본적인 심리적, 신학적 토대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 결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누구신지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믿는 것이며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이 무엇인지를 믿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을 개인화 시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와 구주로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순종하여 사는 것도 포함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며 충성된 믿음이며 예수를 따르는 믿음이며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벧전3:21).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인내하게 하며 하늘에 속한 것들을 소망하게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살도록 하며 겸손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으로 인도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자로 하여금 빛과 소금의 삶을 살도록 역사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이끈다. 순종은 새로운 계명인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지키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도록 한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지속성이 없다는 특징이 있으며 세속적인 삶의 영위로 그 결과가 나타나며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특징을 갖는다. 사랑은 믿음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딤전1:4). 따라서 불신자는 참다운 기독교적인 사랑을 발할 수 없다. 믿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며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믿음도 참 믿음이 아니다. 사랑은 이웃을 향한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서 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분리된다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설교자들은 설교에 있어서 이러한 믿음의 열매들이 차후로 서서히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인들을 잘못된 평안 속에 안주시켜 버릴 수 있다. 교인들을 끊임없는 추구와 소망으로 거룩한 긴장으로 이끌어야 올바른 설교이다. 참된 평안과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를 바르게 바라보는데서 나와져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진정성은 오직 열매에 의하여 분별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되 분리시키지 않으며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구주되심은 인정하려는 값싼 은혜를 배제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죄들을 범하는 사람에게 결코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 해서는 안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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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프리 W. 브라밀리 편역, 신약성서 신학사전, (서울:요단출판사,1993), p. 779

2) Joseph Henry Thayer,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Indiana: The Book Factory, 1979), p.610

3)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의 도래, 김형주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88), p.9

4) G.E. 래드, 신약신학, 이창우 역, (서울:성광문화사, 1983), p.89

5) 도날드 거스리,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사역, 이중수 역, (서울:성서 유니온, 1987), p.324

6) 레온하르트 고펠트, 신약신학1 ,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111

7)요아킴 예레미아스, 신약신학, 정충하 역, (서울:새순출판사,1991), pp 364-368

8) G.E. 래드, p.104

9) 밀라드 J. 에릭슨, 구원론, 김광렬 역, (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2), p.84

10) E. P. 샌더스 저, 예수와 유대교, 황종구 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336

11) 죠오지 E. 래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태훈 역, (서울:엠마오,1993), p.148

12) 아더 핑크, 구원의 교리, 윤종훈 역, (서울:풍만, 1989), p.88

13) 제프리 W. 브라밀리, op.cit., p.486

14) 아더 핑크, op.cit., p.128

15) 존 스토트 저, 로마서 강해, 정옥배 역, (서울:IVP, 1996),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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