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세우시는 하나님

 

 

한국 사회에 점점 ‘권위’를 찾기란 힘들어 보인다.

이미 교회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온전한 ‘권위’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 하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밑에 들어가 좋은 것들을 배우고... 좋은 영향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대중매체를 통해 흐르는 ‘유행’을 모방하기에 정신이 없다. 아니 단순히 흉내내기가 아니라 복종에 더 가깝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이 화려하지만 금방 사라져 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는 것 같지만...

얼마되지 않아 또다른 유행에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감이 상실되거나 도태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함까지도 서슴없이 버리면서 ‘유행’을 위해 위험한 경계선도 넘게된다.

 

신종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유행’을 따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유행’보다는 개인의 '생명'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유행’과 ‘권위’ 사이에서 ‘유행’을 선택해왔다.

‘유행’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성경의 권위’보다는 '자유'를 선택했다.

‘유행’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권위’아래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투쟁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행’이 퍼졌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조금만 문제가 발생해도 '유행'처럼 원망했다.

유명 연예인 사진을 들이밀고 그 스타일을 갈망하다가

막상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원장의 미용 실력을 원망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권위’에 순종이 아니라 ‘유행’처럼 모세를 원망했다.

 

‘유행’에 민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원망했다.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 14:11, 12)

 

이 외침은 지금 한국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외침처럼 들린다.

교회를 들어다 보면 목까지 차오르는 원망들로 가득하다.

가정을 봐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고 있다.

선생은 학생을, 학생은 선생을 원망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위'에 대해 가르치신다.

모든 백성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영향력 아래 있도록 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모세 뿐만 아니라 모든 지도자에게 ‘권위’를 인정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을 내밀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일 하셨다.

백성들은 그 손 아래 들어왔다. 그 '권위'앞에 무릎 꿇어야 했다.

자신의 '생명'과 직결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지도자에 대해 순종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 온다면...

최소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관자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순종'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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