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신학
침례교 신학(Baptist Theology)
1부 신학적 특징 개관
1. 우선해야 될 질문들
1) 침례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신학적 논쟁
A. 역사에 대한 침례교인의 태도
a. 대체로 역사에 무관심
b. 역사가 자신과 그리고 과거가 현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태도를 지님. 오직 현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듯한 태도. [Walter B. Shudden, Not a Silent People: Controversies That Had Shaped Southern Baptists (Macon: Smyth & Helwys, 1995); 침례교 신학논쟁, 김용복 김태식 공역(대전: 침례회 출판사, 2000), 29]
B. 역사에 대한 무관심한 이유들
* 역사에 대해 무지: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무지.
* 역사 연구의 부재
* 침례교 역사의 교육부재: 교회가 침례교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 유산에 대한 부끄러움: 과거를 감추고자 하는 듯한 태도. 침례교단은 과거에는 주류에 속하지 못한 교단이었음. 따라서 그들의 기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지님.
* 19-20세기의 개인주의(혹은 계몽주의)의 영향. 개인이 진리의 판단 기준.
* 특정 교리에 대한 편향. 만인제사장설이나 최종적 권위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뢰로 인해 신학적 전통이나 사회-문화적 요인을 상대적으로 무시함.
* 기원자체의 불확실성
* 현재에 만족
= 현재 미 남침례교는 미국의 최대 개신교단, 50,000교회, 1800만 성도
= 최대의 출판사(LifeWay), Seminaries, universities and colleges, Annuity Board, Baptist Hospitals,
=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냄, Billy Graham, Martin Luther King, Jr., Jimmy Carter, Bill Clinton, El Gore, Jessey Jackson, Gingrich, Jerry Falwell,
* Successionism의 영향
* 영국 청교도 분리주의의 후예설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
2) 침례교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
A. Landmarkism(지계석운동)의 정의: 길잡이가 되는 경계표
b. 창시자: G. H. Orchard; J. R. Graves, J. M. Pendleton, A. C. Dayton이 대표자
c. 이 주장에 따르면 침례교는 단순히 17세기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침례 요한,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 Donatist 등으로 연결되어 왔다는 주장.
d. 19세기말에 주로 남 침례교인에게 유행
e. Successionism은 전혀 역사적인 연구가 아니었다.
f. 이 주장은 결코 타 교단에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침례교만이 참교회라는 주장을 함.
g. 지나친 교회론의 강조.
* 마 16:18의 내 교회”는 철저히 지역교회이며 이 교회는 침례교회를 의미한다.
* 침례교회가 아닌 것은 그냥 church 혹은 종교집단, sect라 부름
i. Southern Seminary의 교수였던 W. H. Whitsitt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음.
= Whitsitt에 의해 남침례교인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
j. 성행했던 이유
* 19세기의 많은 교파들이 자신들의 교파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
* 대체로 침례교는 풀뿌리 신자들
* 목회자의 교육부재
* 창시자가 없다는 비판에 민감
B. Anabaptist 영혈설
a. 일종의 계승설
* 침례교는 anabaptist에 영향을 받았음으로 이들과 영적인 혈연관계 존재
b. 근거
* 교리적 유사성
* 행습적 유사성
* Smyth와 Helwys의 anabaptist 접촉
c. 문제점
* 역사적 사료의 부족
* 초기의 일반 침례교의 신앙고백(1660)은 "falsely called anabaptist"란 주장을 함.
* 역사의 미묘성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d. Aanabaptist와 Baptist의 차이점
* 공통점
= 침례 시행
= 신자만의 교회
= 성경이 최상의 권위
= 종교적 자유강조
= 회중정체
* 차이
= 세속 정부 참여 여부(공직, 투표, 맹세) anabaptist는 통치자는 교회에 받아들이지 않음
= 전쟁에 대한 견해
= 교리차이(영혼 수면설, 우주적 교회관,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C. 분리주의 후예설
a. 침례교의 조상은 영국 청교도의 분리주의의 신앙과 행습에서 유래했다.
b. 주창자
* William H. Whitsitt
= "A Question in Baptist History"(1896)에서 1641년에 처음으로 침례가 baptism by immersion시행.
= 1609-1611까지는 침례시행
= 따라서 1641년이 침례교의 기원이다.
= Landmarkism의 주창자들의 압력에 의해 Southern의 총장과 교회사 교수직을 자진사퇴
* Augustus Strong
= Rochester Seminary의 조직신학 교수
* John H. Shakespeare
= 20c 초반의 영국 침례교 목회자
= “Baptist and Congregational Pioneers”(1905)
= General Baptists(1611)은 1711말 unitarianism에 빠짐. 1770년 New Connection.
= Particular Baptists(1638)와 General Baptist는 하나의 교단 형성. Baptist Union(1891)
* Aenry C. Vedder
= Pennsylvania의 Crozer Seminary의 교수
= 문서상으로 침례교는 1610년부터 교파 형성
= 1641년부터는 교리와 행습에 있어서 완전한 교단으로 발전
c. 역사적 변천
* Henry 8세의 1534년 수장령발표(Catholic과의 단절)
= Edward 6세의 개신교 칼빈주의
= Mary 여왕의 Catholic 전향
= Queen Elizabeth의 Anglican church
= James 1세의 청교도 핍박
* Puritan의 정의
= Anglican의 반쪽 개혁에 불만을 느끼며 Anglican church는 비록 참교회이긴 하지만 타락했다(corrupt but true).
= Calvinism과 장로정체(일부 회중체)
* Separatist의 정의
= Anglican church는 totally corrupt church
= Calvinism과 congregationalism
= 국교회와 결별
= Elizabeth시대에 약 1,000명 존재
* Separatist와 Anglican의 차이
= Separatist는 중생한 자만의 교회 인정/ 국가 교회 인정
= 언약과 visible saints에 의해 교회 구성
= self-governing local church
= 협력강조
= 지역 교회는 재정을 국가의 조세에 의존 않고 신자의 자발적 헌금에 의지한다.
* Separatist의 지역 교회의 권리
= 개 교회는 복음 설교권을 갖는다.
= 성례전을 시행할 권리가 지역교회에 있다
= 직분자 선출하는 권리
= 징계권 시행
* 지역교회의 의무
=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 교회는 성경의 권위아래 있으며
=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한다.
* Baptists versus Separatists
= 양심(신앙)의 자유란 공통된 견해
= 분리주의자들: 참 교회가 확립되면 국가는 그것을 보존, 양육하고 거짓된 예배나 사역자를 축출할 의무를 진다.
= 침례교회: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
3) 침례교신학의 어려움
A. Walter B. Shudden의 주장
a. 은 침례교 신학자들은 자유와 다양성 때문에 침례교 신학이란 제목의 신학을 저술하기를 꺼려했다는 주장을 했다.
b. 이 주장은 그리 납득할만한 것이 못된다. 타교단의 신학자들도 교파의 이름으로 신학을 저술한 일은 찾기 힘들다. 예를 들면, 장로교 신학이라든지 혹은 감리교 신학이란 제목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 Calvinist theology 혹은 Arminian theology, Wesleyan theology등은 있다.
* Shudden의 주장은 어느 정도는 옳다. 침례교에는 특정한 사람의 신학이나 혹은 고유한 신학으로 분류된 뚜렷한 신학적 체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 그러나 침례교신학자들이 신학이 없다거나 체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B. 역사적 출발의 모호성
a. 침례교는 장, 감리교와는 상당히 다른 출발을 갖고 있다. Luther 와 Melanchton을 따르는 Lutheran은 루터의 신학에서 유래했다. 장로교는 대개 Zwingli와 Calvin, Beza, Vermigli, Zanchi의 신학적 전통을 따른다. 감리교와 Nazareth, 한국의 성결교는 John Wesley의 신학적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Baptist는 특정한 교리의 형성이 될 만한 신학적 사조나 혹은 주요 인물을 따른 교파가 아니었다. 침례교는 종교개혁의 원리가 영국 상황에서 보다 실천적이고 창의적으로 접근되도록 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침례교의 주된 관심은 참된 종교개혁의 원리가 교회에 좀 더 철저하게 실천되도록 접근한 종교 개혁신앙의 한 형태이며 종교개혁이 다 못 이룬 참 교회의 실현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람으로 이루었던 무리이다. 마치 종교개혁신학이 교부시대의 진정한 신학의 원리를 회복하려던 것처럼, 침례교는 종교개혁의 다 못 이룬 교회론의 진정한 성취를 이상과 실현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b. 두개의 서로 다른 침례교회의 독립적인 출발
* General Baptists
= 창시자: Thomas Helwys
= London근교의 Spitalfield에 최초의 General Baptist Church 설립(1611)
= 신학적 특성: 칼빈주의적 예정론과 메노나이트식의 자유의지론도 거부
= General Baptist는 Particular Baptist 교회보다 더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형태의 교단
* Particular Baptists
= 최초의 교회: London 근교(1638 혹은 1633)
* 하나의 교단으로 형성된 것은 1891(Baptist Union의 형성으로 하나의 교단이 됨)
C. 침례교의 다양성
a. 유럽의 침례교단
b. 영국 침례교단(English Baptists)
c. 한국 침례교단
d. 미 남 침례교단
e. 미국침례교단(American Baptist)
f. Conservative Baptist
g. Reformed Baptists
h. Freewill Baptists
i. Primitive Baptists
j. Regular Baptists
k. 남미의 침례교단
l. 캐나다 침례교단
m. 아프리카의 침례교단: Kenya, Nigeria
2. 침례교인의 신앙과 신학
1) 개관
침례교인들이 믿는 신앙은 직접적으로 청교도와 분리주의의 신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가깝게는 종교개혁의 유산과 영향아래 탄생한 교회였으며 감리교보다는 그 출발이 앞섰다. 침례교회의 신앙은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의 신앙과 매우 가까우나 교회론과 일부 교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의 신앙과 독특한 신학은 분명히 종교개혁의 유산을 새롭게 발전시킨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앙의 자유의 교리도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진술한 신자의 자유 교리를 침례교인 당대에 새롭게 해석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침례교 신학을 진술하면 침례교의 신학은 분명히 개신교적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후손이다.
침례교 신학을 진술하는 쉬운 방법의 하나는 침례교 신학과 주류 교단의 신학과의 유사성과 독특성을 구별하여 진술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물론 예비적(preliminary)이다. 이로서 침례교 신학의 다양함과 역사적인 변화를 다 읽어 낼 수는 없지만 ““침례교인이 믿는 신앙은 무엇인가?” 혹은 “침례교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내리기에는 충분하다.
2) 침례교와 개신교의 동일성과 차이점에 대한 인식
A. 다른 교파와 공유하고 있는 교리와 달리하는 교리를 구별하여 줌으로써 침례교인들의 신앙이해를 도왔던 미국 침례교의 두 신학자를 소개한다.
B. Isaac Backus(1724-1806)
흔히 “미국 침례교(미국내의 모든 침례교)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로저 윌리암스 이래로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종교 자유의 챔피언"[William Henry Allison, "Isaac Backus," in Dictionary of American Biography, ed. Allen Johnso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으로 인정되는 아이삭 벡커스는 1724년 1월 9일 코네티컷의 한 농장에서 출생했다. 제 일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의 영향아래 회심하여 1746년 목회사역을 시작하고 1748년 분리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회중교회의 건축에 필요한 기부금(subscription)을 거부하여 감옥에 갇힐 뻔했으며 오직 침수침례와 믿음의 침례를 받은 신자(즉 유아침례는 제외)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벡커스는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는데 아래의 긴 제목이 붙어있다.
ARTICLES OF FAITH AND CHURCH COVENANT
THE CONFESSION OF FAITH AND COVENANT PREPARED BY
THE REV. ISAAC BACKUS, AND ADOPTED BY THE
FIRST BAPTIST CHURCH IN MIDDLESBOROUGH,
AT ITS ORGANIZATION, JANUARY 16, 1756.
a. 특징
* 세 부분으로 구성
= 1부: 기본 교리의 간명한 진술
= 2부: 교회론의 진술
= 언약(Covenant)
* 기본 교리는 다른 신학과의 공통점을 강조
= 하나님의 전지, 전능, 무한, 영원, 거룩, 불변의 속성 인정, 삼위 일체, 선한 창조, 형상으로서의 인간, 타락과 영적 사망, 선택,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성령의 구속 적용, 안식일, 세상정부와 교회의 관계, 부활과 심판, 영생의 교리.
* 별도의 교회론에 대한 진술은 차이점 강조
= 유형교회
= 교회의 두 가지 예식인 침례와 성만찬
= 교회의 직분임명권, 해직권
= 목회자와 집사의 직무에 대한 규정과 제한
=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는 삶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
C. F. H. Kerfoot(1847-1901)
목회자요 교수이며 침례교단의 큰 일꾼이기도 했던 Kerfoot는 1847년 8월 29일 버지니아의 클락 카운티(Clark County, Virginia)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켄터키출신의 어머니사이에 출생했다. 1866년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 6년 과정의 철학 학부와 법학부를 3년 만에 졸업하고 1869-70년까지는 So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당시에는 Greenville, South Carolina)에 다니다 질병으로 중단했으나 Croz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1872년 졸업하고 목회와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1889년에 Southern Seminary의 교수가 되었고 1899년에는 남 침례교 총회 산하 국내 선교부(Home Mission Board, 지금은 North America Mission Board)에서 일하다 1901 6월 22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a. 신앙고백서(What We Believe According to the Scriptures)
* 서문
* Doctrines Which We Hold in Common with Other Denominations
= 창조주 하나님, 선한 창조, 타락, 구원의 주권성, 무오한 성경, 복음의 보편성, 성령의 구속사역, 안식일, 중간기, 부활, 심판, 영생.
* Distinctive Doctrines of Baptists
= 신앙과 실천의 충분한 근거로서의 성경
=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신앙, 교회와 정부도 개인의 양심을 제한하지 못함
= 회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속성 때문에 유아 세례 반대
= 신자의 교회
= 교회의 두 직분인 목사(혹은 장로)와 집사(빌 1:1)
= 믿음을 뒤 따르는 침례
+ 마 28:19-20; 행8:38, 39; 갈 3:27; 벧전 3:21; 딛 3:5; 롬 6:3-5; 골 2:12)
= 지역교회의 자율권, 협력사업
= 개 교회의 결정은 지방회나 교회회의에 우선한다.
= 성찬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기념
.......(중간 부분 사라짐)....
3) 성경관(Doctrine of Scripture)
A.종교개혁의 근본정신과 침례교 신학
a. 침례교의 성경중심사상은 분명히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를 이어 받은 것이다.
* Luther의 종교개혁은 독일어 성경번역과 구텐베르그의 인쇄기의 발명의 도움을 입었다.
= 만신자 제사장설과 오직 성경 그리고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히는 계기가 되었다.
*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보다 늦었지만 성경 번역만큼은 오히려 독일을 앞섰고 활발했다.
= Shakespeare:“. . .the great discovery, therefore, of the age was not the New World, but a book."
= John Wycliffe의 영어 성경(1382)
= John Tyndale의 신약성경(1525)
= Miles Coverdale(1535)
= Great English Bible(1539)
= King James Version(1611)
* 당시의 높은 문맹률을 감안하더라도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따라서 침례교는 교회의 형성기부터 종교개혁의 중심인 성경의 권위를 교황의 손에서 되찾아 모든 성도에게 돌려주는 시도를 한 종교개혁의 후손이었다. 영국의 활발한 성경번역작업과 성경의 유포로 인해 성경은 이미 특수층의 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린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오직 성경으로’의 기치는 침례교의 형성에 큰 자극을 주었고 침례교는 이 유산을 깊이 간직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최우선성에 대한 침례교인의 깊은 확신은 1689년 제 2차 런던 신앙고백서애 잘 나타나있다. 이 신앙고백은 모두 32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번째 항목은 ‘거룩한 성경에 대해서'(Of the Holy Scriptures)이다. E. Y. Mullins도 성경을 최우선시 하고 있으며 멀린스의 영향을 받은 허셀 홉스(Herschel Hobbs)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1963년의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에서도 성경이 다른 모든 교리에 앞서서 가장 먼저 진술되고 있다. 해롤드 픽켙이 쓴 ’침례교인의 신앙‘은 침례교인이 믿는 기본 교리를 설교한 것인데 1장은 성경교리에 대한 설교이며 “침례교인과 성경”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해롤드 픽켙, 침례교인의 신앙(서울: 침례회 출판사, 1975)]
B. 신앙고백과 성경 중심사상
a. 침례교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의 하나는 침례교인들이 모든 종류의 신앙 고백(Confession)이나 신조(Creed) 혹은 교리(doctrines)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황당한 주장이다. 월터 셔든(Walter Shudden)이 바르게 주장하고 있듯이 침례교인들은 침묵하는 신앙인들이 아니라 마치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바울의 이방인교회가 직면했던 할례와 의식의 문제를 두고 격렬하고도 자유로운 논쟁과 성경해석, 그리고 영적 지도자의 종합과 제안을 통해 성령의 뜻을 깨닫고 실행하고 신앙의 근본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자유성을 부여하는 결정을 내렸던 것처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신앙의 갈등을 논쟁과 성경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했던 침묵하지 않은 사람들(Not a Silent People)이었다. 물론 신학연구는 모든 교단에서도 자유롭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나 교단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신앙고백의 문제는 많은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그들의 상황에 맞도록 재조정했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이 그들의 공유된 신앙의 내용을 정리하고 수정하는 일, 다시 말하면 영원한 진리인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공유된 이해를 정리한 신앙고백은 침례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언제나 절대적이었다.
먼저 신조라는 단어는 라틴어인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도신경의 ‘믿사오며(I believe)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신조라는 단어는 거의 공교회(catholic church) 기간에만 적용되었으며 교단자체의 신앙고백을 나타내는 말에는 거의 Confession란 말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은 Apostle's Creed, Nicean Creed, Chalcedon Creed로 쓰나 루터란의 Augusburg Confession 혹은 개혁교회의 the Reformed Confession of Faith 그리고 1689년의 침례교 신앙고백인 Baptist Confession of Faith는 고백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신조와 신앙고백의 신학적인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역사적인 현상에 해당한다.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신조와 신앙고백은 거의 유사하다.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신조를 다음과 정의한다. “신조란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내용에 대한 간결하고 공식적이며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인정된 진술이다.”[McGrath,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19940), 17.] 침례교인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신앙고백(Confession)과 신조(Creed)를 구별한다. 침례교의 신앙고백은 다른 견해를 정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과 일치성을 유지하고 공유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정체성을 표현한다. 침례교인이 이해하는 신앙 고백은 글자 그대로 고백의 성질은 갖고 있다. 고백에는 강제성이 없다. 그저 자신이 알고 믿는 것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신앙고백은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은 이 점을 다른 누구보다 더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침례교인은 아무리 뛰어난 신앙고백이나 교리도 성경의 권위아래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신앙고백이나 신조 혹은 교리를 수정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1963년의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에는 성경에 대한 교리를 이렇게 진술한다.
“거룩한 성경은 신적으로 영감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은 신적인 교훈을 담은 완벽한 보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저자로, 구원을 목적으로, 오류가 섞이지 않은 진리를 그 내용으로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이 되는 원리를 드러내며, 그래서 이 세상 끝 날까지 남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참된 연합의 중심이 되고, 모든 사람의 행동과 신조 그리고 종교적 견해를 시험(test)하는 최고의 기준(the supreme standard)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준거(criterion)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The Baptist Faith and Message, rev. ed. (Nashville: Convention Press, 1996), 19; translated into Korean by Dr. Yongsoo Jo]
C. 남 침례교인들의 신앙고백서의 변천
원래 남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는 1960-70년대의 남 침례교의 지도자였던 Herschel Hobbs에 의해 만들어졌고 교단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역사적으로는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미 남침례 신학대학원)의 초대총장이었던 James P. Boyce가 만든 Abstract of Principles로 모든 신학교의 교수는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을 함으로서 교수로서 사역할 수 있었다. 1925년에는 Southern Seminary의 E. Y. Mullins에 의해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가 채택되었고 1963년에는 Herschel Hobbs의 주도로 신앙고백이 수정되었다. 1996년에 이 고백서는 다시 수정되었다.
4)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앙과 양심의 자유
침례교가 믿어온 신앙의 자유란 원리상 정치적인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로마 카톨릭이후 지속된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 온 유럽을 덮고 있는 상황에 침례교적(재 침례교와 분리주의 사상을 포함한) vision이 실제적으로 정치적 혁명으로 보였을 것이란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침례교 이상이 의미하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국가나 교회란 사회를 떠난 철저한 개인주의적 자유와 상당히 다르다. 침례교인들이 처음부터 지향해 온 바는 소위 자유 교회 운동(Free Church Movement)이나 Sectarianism(분파주의)적인 소수의 집단적인 형태가 아니라 보다 신앙적 순수와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신앙운동이다. 감리교 역사가인 Franklin H. Littel의 글을 인용한 Robert G. Torbet의 말은 이 점을 확인시켜준다.
“침례교인들이 물려받은 이 자유교회전통을 간략하게 분석해 보더라도 자유 교회인을 결코 아무런 매인 곳이 없는(unbridled) 개인주의 원리에만 귀결 시킬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연단된 교회, 외적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으로 연단된 교회를 주장했다. 그들은 진정한 교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가졌는데, 이 진정한 교회란,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담대하게 그들의 신앙을 증거 하는 하나님에 대한 계약 관계로 묶여진 신자들의 집단 교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이며 사회적 문화적변용에 의하여 세상적 지위를 획득한 교회는 타락한 교회’였다. 그러므로 자유란, 교리나 개인적 생활에 있어서 면허를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토론에 있어서 민주주의적으로 연단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참여에의 자유를 의미한다. . .”
5) 교회내의 정치: 회중정치와 만인제사장설
A. 개관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17세기의 침례교인들인 존 스미스, 토머스 헬위스 및 존 번연에 의하여 발전되었으며 그리고 교회에 관한 그의 저술이 당대에 침례교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던 회중교도인 존 오웬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모든 회원을 신앙 공동체의 총체적 생활속에 가담시키며 그 회중의 교회 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회중교회의 교회제도의 견해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를 성직자 계급에게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전체에게 위임했다고 믿는 그들의 확신 때문이었다. . . 그들은 직책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성직자라고 부르지 않고 직무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성직자라고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로버트 G. 토베트, 침례교회사, 허 긴 역 (대전: 침례신학 대학 출판부, 1984), 35; Quoted in Franklin H. Littel, The Free Church (Boston, 1957), 85, 114.]
B. 만인 제사장교리는 종교개혁자의 기본 사상이었다. 그 기본은 모든 신자는 성별된 제사장의 중보 없이도 그리스도앞에 나가면 대제사장이신 주님이 지성소안에서 단번에 이루신 대속으로 이루신 화해의 공로로 주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연합이 전제되어 있다. 해서 모든 신자는 주교나 교황이 아니라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 자신과 연합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 연합이 확고하게 서면서 종국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된다.
이 교리는 교권적이고 수직적인 로마교회의 성례전적인 경직을 버리고 동시에 미사(mass)때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다시 이뤄진다는 사실을 히브리서에 근거해서 부인한다. 따라서 개혁자들이 가진 구원론의 회복은 교회론의 실제에까지 이어졌다. 이신 칭의는 그 신학적 근거를 그리스도의 한 영원한 속죄를 전제하며 이에 따라 예배는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근거하여 믿음과 겸손으로 주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주님과의 교제를 나타낸다. 다시 속죄가 필요 없기에 예배는 감격과 감사와 찬양 그리고 용서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예배는 모든 생활예배의 표준이며 동기를 부여한다. 이 교리로 인해 성만찬은 믿음으로 또 이미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참여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성만찬시에 다시 희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복음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따라서 개신교의 신학적 근거에서는 성만찬은 필연적으로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다.
한편 만인제사장의 교리는 교회내의 정치에도 이어진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면(“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라고 하지 대제사장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교회를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목회직은 하나님께로 오는 은혜를 받기 위해 위의 단계인 주교를 의지하지 않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을 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특별한 부르심은 입은 성직자는 보편적인 부르심을 입은 성도를 인도하여 그들이 자라나고 성화하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준비되도록 세우고 도와준다. 루터와 칼빈은 이점에 이르지 못했다. 그들의 교회의 개혁은 그들이 품었던 위대한 신앙의 원리를 교회내에 충분히 실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바로 이점이 침례교회가 발전시킨 위대한 유산이었다. 재침례교가 가진 교회관은 외형상 침례교와 비슷하나 이들은 루터와 칼빈이 가진 개혁사상의 근본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고 있었다. 개혁가들의 미완성 교회관은 후대에 넘겨졌고 영국이란 정치 사회상황에서의 자란 분리주의자들 속에서 새롭게 잉태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의 목소리에 압도당한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신앙을 교회에 적용하고 새로운 교회를 태동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일반 침례교회와 특수 침례교회가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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