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 오직 성서


  1521년 4월 18일 대학에서 신약 성서 교수였던 마틴 루터라 불리던 수도사는 이 세계의 절반의 통치자인 황제 찰스 5세와 보름스시에 모인 독일 귀족들 앞에 섰다. 황제와 귀족들은 루터가 그의 신학적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교황과 연합했다.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철회를 거절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실로 루터의 신학은 일련의 논쟁들 속에서 발전하였다.

칭의의 의미에 관한 초기 논쟁들에서부터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칼슈타트나 뮌터와 같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자들과 벌인 권위의 문제에 대한 싸움, 주님의 만찬에 관해 스위스 개혁자 츠빙글리와 벌인 논쟁에 이르기짜지 일련의 논쟁들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런 모든 논쟁들을 통하여 루터는 개핵의 프로그램을 추구하였다. 여기서 그의 이런 논쟁들을 추적하며 근본적인 반대들을 소개하며 루터 이후의 루터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세상에 반대한 루터


  루터가 배운 유명론자 신학은 대체로 은혜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을 통해서 구원을 획득한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의 행위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후로 바울의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그는 구원을 획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롭지 않고 죄인들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만 의롭다고 인정될 수 있다. 그리므로 우리 칭의는 성취가 아니라 선물로 온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루터의 사고는 1517년 그를 면죄부에 대한 투쟁으로 이끌었다. 중세 고해 성사의 체계에서 죄로 인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용서와 함께 고해 성사가 지시하는 과제를 받았다. 그러나 만일 교회나 몇 가지 가치있는 구제가 돈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죄인은 좋은 목적에 기부하는 댓가로 고해 성사의 전부 또는 일부를 면할 수 있었다. 고해 성사로부터 면제시키는 바로 그것이 "면죄부"였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조항을 작성하였다. 면죄부 사상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래서 루터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루터는 르네상스 전통의 상속자들이 많은 독일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최초의 지지를 얻었다. 이제 루터는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학이 성경의 본문에 근거하기를 원했다. 더 나아가 인문주의자들은 "미신"을 싫어했고 면죄부 판매나 성인들의 성물에 입맞추는 것을 언짢게 여겼다. 루터 역시 이 관습들에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따르지 않았다. 유명한 네덜란드이 성서학자요 북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가장 유명한 예를 보여준다. 에라스무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서로에게 관대하려고 노력하는 단순하고 윤리적인 기독교를 복원하기 위해 부패와 미신을 일소하려고 하였다. 루터는 그가 관대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엄청난 심리적 위기를 견뎌 내었지만, 그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내맡겨야 했다. 그는 완전한 결정론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이룰지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성서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고 둘 다 부패를 반대했지만 에라스무스는 사람들이 오로지 노력한다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설득하고자 한 반면, 루터는 인간의 그러한 모든 노력이 무익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주제에 관한 루터의 본질적인 보수주의는 일찍이 칼슈타트와의 논쟁에서 명백해졌다. 칼슈타트는 성령의 음성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언제나 그의 선배 동료인 칼슈타트에 대해서는 일종의 연민을 가지고 있었지만 뮌처에게는 이런 다정함이 없었다. 많은 젊은 인문주의자처럼 뮌처도 루터의 사상들의 흥분에 사로잡혔지만, 칼슈타트처럼 그는 곧 성서보다는 성령의 내적 음성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칼슈타트와 마찬가지로 뮌처는 부분적으로 성령이 성사학에 필요한 교육을 길여한 사람들에게조차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권위를 가치있게 평가했다. 점차로 그는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안락을 말한것이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말했기 때문이다. 뮌처에게 루터는 나락한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루터는 그의 종교 개혁이 한계를 두었다. 그는 교황과 고의회로부터 떠나 성서에 호소하려 했지만, 성서가 성령의 내적 음성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는 교회의 위계질서를 공격하려 했지만 정치적 권위에 대항하는 폭동은 그에게 잘못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과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강조점을 달리했다. 루터는 믿음에 의한 칭의에서 시작하여 이 원칙이 분명하게 성서에 선언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서의 권위에 의지했다. 츠빙글리는 성서의 절대적 권위에서 출발했다. 츠빙글리에게는 죄에 대한 루터의 절망감이 부족했다. 그는 원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원죄가 실제로 죄라는 것조차도 부인했다. 그는 원죄를 질병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는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전통에 보다 가까웠다. "미신적이며" 혹은 "부패한" 관습들에서 교회를 청결케 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루터가 그랬던 것 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모든 인간 활동이 하나님의 주권 통제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다른 근거를 가졌다. 루터의 종교적인 경험은 인간의 노력의 무력함과 신적인 은혜의 힘을 가르쳐 주었다. 츠빙글리는 오히려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하는 철학적인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과정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벨과 그의 친구들은 순수성을 추구했다. 그들은 타협없이 이해한 대로 성서를 따르기를 원했고 재세례파에 가입하고 따르기로 개인적 결정을 한 헌신적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기 원했다.


급진 종교 개혁


  급진 종교개혁에 대한 현대의 가장 훌륭한 역사가인 조지 윌리엄스는 급진주의자들을 재세례파, 영적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반-삼위일체론자 혹은 합리주의자들로 나누었다. 재세례파들은 취리히의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친구들 같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이미 어릴 때에 세례를 받아 어른드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유아세례는 신앙의 참된 헌신과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재세례파들은 보통 폐쇄된 공동체로 물러나 성서의 문자적 권위를 강조한 ㄱ서에 반해서 영적 신비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에 찬성했고 성령의 내적 음성의 인도를 따랐다.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는 종교개혁의 초기에 얼마간 이런 주제를 탐구하였지만, 후기의 영적 신비주의자들은 적어도 뮌스터에서 두드러진 혁명적 정치를 거부했고 개인의 삶에 집중하였다.


루터파의 발전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최초의 결별 이후 루터의 가장 영향력있는 행동은 아마도 성서를 번역한 것과 결혼한 일일 것이다. 그의 성서 번역은 평범한 독일인들이 쉽게 성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세기 동안 독일어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성직 독신주의는 성직자를 평신도와 분리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고, 실제로는 끝없는 타락을 야기했다. 루터의 결혼은 루터파의 "만인 제사장"의 교리에서 의미하는 평동성의 가장 생생한 상징을 제공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루터 운동의 지도력은 그의 젊은 친구인 필립 멜랑히톤에게로 넘어갔다.


  1580년까지 루터파들은 협화신조에서 표현한 일반적 합의에 도달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멜랑히톤의 타협을 정죄했고 또 오시안더를 정죄했으며, 사람들이 조각상이 아니고 은혜가 마치 그들이 조각상인 것처럼 그들에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반면, 죄인의 의지가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멜랑히톤과 스트리겔에게 반대했다. 이 가운데 어떠한 것도 루터의 견해와 모순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마도 불가피하게 그의 통창력 가운데 무언가가 상실되었다. 루터는 항상 순간마다의 열정으로 말했다. 그의 사상들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그것들을 철학적 술어를 통해 설명하려고 한 모든 노력이 불가피하게 그의 사상들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오직 믿음과 오직 성서를 옹호했고, 후기 루터주의자들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 믿음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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