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정신과 회중정치

 

Ⅰ. 문제제기

 

침례교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또한 침레교의 발전사와 역사를 배우고 있는 학도로서 한국 침례교단의 하나되는 공동체성을 위협하고 있는 문제 즉, 장로직제에 대해 문제로 많은 고민중에 있었다. 더욱이 94년도에 내가 입학했을 당시 학교에서는 장로직분이 침례교에 유입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이 학생 사이에서 일어났었다. 그때 나는 침례교회가 취하고 있는 회중정치 원리와 침례교 정체성 문제에 올바른 인식이 필요함을 느꼈으며 이러한 인식이 바로 침례교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침례교회가 회중정치를 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고, 각 교회가 이 원리를 시행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그 중에는 전혀 시행하지 않는 교회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회중정치는 침례교 신학의 이상 중의 하나이다. 이 회중정치는 침례교회의 다른 이상과 정신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이상이 흐려진다면 침례교 정신이 무너짐은 물론 이거니와 이상과 정신이 무너진 이상 결코 미래가 밝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현재 이러한 이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침례교의 정체성 문제에 있어서 회중정치는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우선 각 교파의 특징적인 정치형태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한국적 상황 속에서의 회중정치와 장로정치의 위치, 장로직제가 침례교단에 등장하게된 계기, 성서에서의 근거, 마지막으로 장로직이 미치는 영향 및 문제점 해결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각 교파의 정치형태

 

세계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는 참된 공동체로서 바로서기위한 크고 작은 내적 갈등과 개혁의 움직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에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조직이나, 구성, 그리고 직분에 대해 어떤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았으며, 제자들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질문이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강림과 더불어 교회가 설립되면서 기독교 원시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 공동체는 처음부터 지금의 교회와 같은 조직이나 제도를 가지고 출발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직과 직분이 강조되고 구체화 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는 나름대로 정치원리가 생기게 되었으며, 현재에까지 끊임없는 역사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각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교회정치의 원리는 성서에서 정당하게 또는 필연적으로 연역되었으나, 교회정치 형태는 교회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지만 교회형성의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정치의 모든 형태를 분명하게 분리하기는 곤란하다.

그 이유는 첫째, 교회정치의 어느 형태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정치의 형태에 관한 주장은 국가와 교회에 관한 견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 많은 교회가 모든 형태의 여러 가지 요소를 혼합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교황정치와 감독정치

교황정치를 하고 있는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교회이며, 감독정치는 감독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형제교회, 모라비안교회, 복음교회, 루터교회 등이다. 이 두 형태의 교회들은 교황이나 혹은 감독 1인을 정점으로 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전제정치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감독정치는 로마교회처럼 사도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모라비안 교회와 성공회교회 등의 예외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하나 감독교회는 감독 혹은 각국의 대회의가 그 교회를 그 교회를 지배하는 권세가 있다고 할 뿐 감독 무오설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서로 다르다. 또한 교회정치가 성직자를 다스리는 계급으로, 평신도를 다스림을 받는 계급으로 양분하고 평신도의 참정권을 허용치 않는 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감독 정치를 따르는 감리교회가 감독이 주장하는 회의에 평신도의 대표들을 참여시켜 대의정치의 편익을 취하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렇지만 교황정치가 교황밑에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 등의 계급이 있는 것처럼 감독정치는 대감독, 감독, 목사 등등 성직에 계급적인 조직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2. 조합교회와 자유정치

이러한 정치는 영국 성공회의 감독정치에 반발한 것으로 교회 안에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떠한 교회의 수장도, 감독도, 국왕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교회를 다스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교회는 주로 회중교회, 독립교회, 침례교회, 조합교회, 그리스도 제자 교회 등으로 이러한 교회들은 회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정치권이 성직자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성직자를 선거하는 평신도에게만 있다는 일단이 주장은 너무 과장된 표현인 듯하며, 또한 조합정치와 자유정치는 전적으로 평신도 전제정치라는 주장도 그러하다. 이 정치의 강조점은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주의와 신앙의 가치 평등성과 자유에 근거한 정치이지 평신도 전제정치라는 표현까지는 지나친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오히려 각 신자들의 효과적인 은사 활용과 봉사(섬김) 직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3. 장로정치

장로회 정치는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는 물론 조합정치와 자유정치도 반대하는 칼빈주의 교회의 정치이다. 장로회정치란 주권이 교황이나 감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로서(?) 주권자인 교인에게 선택된 목사와 장로로 조직되어 치리 외에 다스리게 하는 공화정치이다. 장로정치는 대의제의 정치형태로서 각 교회는 평신도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장로들을 선출한다. 이 정신은 일정한 계급의 장로들에 의해 교회가 다스려지는 제도이다.

 

Ⅲ. 한국적 상황 속에서의 회중정치와 장로장치

 

교회제직교본이라는 저서에서 박병선은 ‘기본권과 치리권’에 대해 언급하였다. “교회를 다스리는 데에는 교권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곧 성직자들이 가지는 성직권과 평신도들이 가지는 기본권이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는 기본권이 잘 인정되지 않으며 조합교회나 자유정치교회는 치리권(성직권)이 부족하거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잘 보완한 것이 바로 장로정치이며 한국적인 풍토하에서는 성직권(치리권)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비대해지기가 일수이고 기본권은 누가 건들이지 아니해도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되기 쉽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유교적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이러한 해석과 태도는 그리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이러한 해석과 태도는 우리나라 상황에 적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교의 계급적인 의식이 짙은 문화에서 장로정치는(감독정치이하도 마찬가지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쉽게 결단을 내리기엔 이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생활의 최고의 권위로써 성서이다. 유교적 문화에 입각한 우리나라 기독교 현실에 비추어보면 목회자와 평신도간의 간격이 너무 차이가 나고 있으며 관료주의적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한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을 단지 교인으로써만 취급할 뿐 신약성서에서의 활동적인 성도들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위한 행정에 있어서 미흡한 점이 많다. 성서는 결코 계급적 직위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단지 기능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이에 목회자는 그 권위에 있어서 성직자 계급과 뚜렷이 구별되는 평신도 계급에 대한 올바른 시정을 위해 만인 제사장주의(벧전 2:9-10)와 각 신자는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가 세움을 입는다는 사실(고전 6:15)을 깨달아야 할 것이며 성직자와 평신도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공동적 동역자이며 목회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Ⅳ. 장로직제문제가 침례교단에 등장한 계기

 

장로직제문제가 침례교단에 등장한 계기가 유교적 의식에 뿌리박혀있는 교회 상위층의 계급적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가 성서적인 근거 아래 발제 되었다기 보다는 계급의식의 가득한 일단의 성향들이 아닌가 싶다. 즉 장로직제에 있어서의 계급적 인식이 침례교회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집사와 장로라는 계급적 격차의 인식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인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침례교회의 이상과 정체성 문제에 있어서라도 걸림돌이 되는 장로직제가 문제제기가 되던 처음부터 단호하게 결말짓지 못한 것은 왜 일까? 단지 손도 못 댈 만큼 한없이 확장되고 부풀어 버린 문제에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Ⅴ. 장로에 대한 성서적 근거

 

초기 교회가 설립되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목적아래 3인 체제(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주측으로 사도들, 장로들이 이루어진 제도적 및 관료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핍박을 계기로 선교적 방향을 위해 제도적 교회에서 유기체적 기능적 교회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도적 정착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활동이었을 것이다.

1세기말에 기록된 사도행전을 보면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공동체를, 후반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 공동체의 활동을 평행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운동을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에 의해 공교회로 통합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히브리문화와 헬라문화의 본격적인 혼합이 이루어져있다. 이에 공교회는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사도적 전승위에 교회의 제도화를 서두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연히 교회의 예법과 의식이 발달하게 되어 사도권 계승을 위한 안수제도, 교회의 일원이 되는 관문으로서의 세례의식, 교인의 특권으로서의 성례식 참여등이 강조되고 경전의 구성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장로는 예루살렘교회에서 등장하며(행 11:30, 15:23), 갈라디아(행 14:22), 에베소(창20:17) 등지로 파급되면서 점점 폭넓게 확산되었다.

장소라는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용어들은 기능에서 발전되었으며, 따라서 그 칭호는 내면의 기능을 함축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도행전 20장 17-28절에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날 때 장로를 감독으로 칭하는 가운데 장로, 감독, 목사가 기능에 의해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기능에 따라 때로는 감독으로, 목사로, 교사로,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자와 교사는 하나의 관사에 의해 연결되며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직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리를 감도하거나 목회하는 기능과 그리고 가르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의 장로, 행정 및 양떼를 감독하는 기능으로서의 장로(감독), 그리고 양떼를 돌보는 기능으로서의 장로(목사)는 하나의 같은 직분으로서 실제적 기능 또는 하는 일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용어가 서로 다른 직분으로 함께 나오는 구절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 감독, 목자는 칭호만 다를 뿐 같은 기능들을 수행하는 동일한 직책이며 단지 상황에 따라 서로 교환되어 사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로직은 어떤 고정된 직분이라기 보다는 지도자의 한 기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중립적인 용어로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이 용어를 무리없이 선택해서 자신들의 지도자를 지칭했던 것이다. 즉,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Ⅵ. 지향해야 할 침례교의 정신과 장로직제에 대한 태도

 

침례교회는 역사적으로 지금것 모든 사제권 제도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간섭으로 부터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개인적 판단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이 자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와 연합된 자유이다. 침례교인들에게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머리되심, 그들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만을 인정한다.

침례교회는 만인제사장주의에 근거하여 예수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권위자로 믿고 있으며 그 안에 어떠한 계급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에 의해서도 지배할 수 없으며 지배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인격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침례교회의 주된 정신이자 이상이다. 침례교의 회중은 수동적인 회중이 아닌 능동적인 회중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자발적인 헌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의 의미는 신앙공동체로서 개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라는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의 모임이다(고전 12:12-31). 다시 말하자면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지체도 혼자만의 중요성을 갖지 못하며 다른 지체와 비교될 수도 없을뿐더러 모든 지체는 서로를 위하며 각각의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참된 공동체란 각 지체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으며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지체가 자신의 은사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이며 그러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가 발전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침례교회에 있어서 장로직의 문제는 어떠한가?

장로교는 앞서 말했듯이 대의제의 정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로교회를 다스리는 정치기구는 당회, 노회, 대회, 그리고 총회이다. 당회는 개교회를 다스리는 치리회, 노회는 소속된 모든 목사들과 지교회에서 올라오는 목사 총대, 장로 총대로 구성된다. 그리고 대회는 노회와 총회의 중간모임이다. 총회는 장로교회에서 가장 높은 치리기구이다. 장로정치에는 평신도들인 장로들이 여러 다스리는 주요직에 산출되어 목사들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감독정치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정치는 교인들이 장로들로 봉사하기 원하는 이들을 산출하는 권한을 가지지만 일단 장로들이 선출된 다음에 다스리는 권세에는 장로들에게 위임됨으로 평신도들이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으로만 그들 자신을 다스리며 참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로정치는 신자의 자유와 제사장 직분에 근거하는 침례교 이상과 정신에 어긋나며 효과적인 교회운영에 그리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모든 신자가 자발적으로 교회운영에 참여하고 적극적인 능동적 참여 의식을 실어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 정치는 곧 회중정치인 것이다.

오늘날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속히 해결하고 모든 침례교회의 지도자들이 각 교파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신약 성서적 교회의 지도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때 침례교회의 장래는 더욱 밝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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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김선배. 「신약 성서에 나타난 장로, 감독, 목사」. 수도침례신학대학 논문집. 1992년.

2) 이정희. 「회중정치의 이론적 근거」. 뱁티스트. 1993년 11,12월호.

3) 노창우. 「침례교회 - 침례교회의 특성과 정신」. 침례회 출판사. 1981.

4) 허쉘 홉즈. 「침례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서로사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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